'경제영토', 상대국엔 어떻게 읽힐까

한겨레 2021. 12. 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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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윤의 환상타파]

[환상타파] 전명윤 | 아시아 역사문화 탐구자

어떤 끔찍한 일이나 충격적 사건을 겪었을 때 발생한다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 경험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식민 지배를 겪었는지, 얼마나 오래 겪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이를 극복했는지 혹은 지배국의 패망 등 외부적 요인으로 식민 지배를 극복했는지에 따라 그 국가와 그 구성원도 집단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19~20세기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중앙·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지역은 식민통치에 시달렸고, 그 트라우마는 종종 과거를 연상시키는 상황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 부정적으로 발화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은 미국의 영향하에 외국인 선교사가 길에서 전도하는 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꽤 많은 나라는 외국인의 선교 행위 자체가 불법이거나, 혹은 길거리 선교 행위가 제한되는 등 다양한 규제정책을 펴고 있다. 제국주의 시절 선교사들은 후일 그들의 식민지가 될 나라에 들어와 선교와 기초적인 지역 조사를 병행했고, 이 내용은 제국주의 국가에 전달되곤 했다. 피식민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벌인 학교나 병원 건립 같은 일보다는 이들의 스파이 행위에 더 주목한다.

이렇듯 식민지 경험을 한 많은 나라는 여전히 자기보다 강한 나라의 행동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몇달 전이었는데, 베트남의 지인들이 필자에게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들고 온 건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가 각 나라와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을 홍보하면서 사용한 ‘경제영토’(Economic Territory)라는 표현이었다. 사실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 표현엔 여러 나라 지식인들을 거슬리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지 저마다 대체 이게 뭔 뜻이냐고들 묻는다.

우리야 무심히, 국내용 자랑거리로 쓴 수사였을 뿐이었지만, 중국, 프랑스, 미국 등 온갖 외세로부터 시달렸던 이 나라 사람들에게 경제영토라는 표현은 제국주의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에이,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이런 표현은 전적으로 국내에서 쓰는 수사일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친구들은 미심쩍어했다.

그들이 그저 과민했다 볼 수도 없는 게 만약 일본이 경제영토 운운하며 한반도를 그들의 경제지도에 함부로 포함했다면 한국도 만만찮게 반응했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을 이겼고, 참전국 중 하나인 한국에도 당신들이 진 전쟁에 무슨 사과를 하냐고 반응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표현에 둔감할 수 없는 게 수없이 침략을 당한 나라의 세계관일 수밖에 없다.

경제영토라는 말은 2010년대 중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니 아직 채 10년이 되지 않은 표현이다. 산업부는 물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심지어 각종 언론까지 별 문제의식 없이 쓰고 있다. 한국인들이 아시아의 여러 곳에 나가 서구인처럼 군단 볼멘소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의 국외 진출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서툴러서 그렇다는 변명이 통하는 시대도 아니다.

덩샤오핑은 도광양회,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실력을 충분히 기를 때까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유지를 남겼지만, 현재의 중국은 이를 중국몽으로 치환시킨 이래 전세계의 경계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야 없겠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신감은 이웃에게 충분히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영토 전쟁은 2차 대전 이전의 낡은 개념이라고들 주장하지만,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벌이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는 결국 그 시기로 다시 되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식민지 경험의 상처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그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은 이 부분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때 식민통치를 경험한 이들이 제국주의자처럼 보이면 세상에 그보다 더 미운 것도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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