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부동산 소송, 친일파 후손이 잘 이기는 까닭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입력 2021. 12. 9.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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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재산귀속법의 문제점

[김종성 기자]

친일재산 환수 소송에서 대한민국 국가가 또 패소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민사12부(재판장 이병삼)가 친일파 이해승 재산의 환수 소송에 대해 국가 패소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 이달 6일 알려졌다.

이해승의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을 상대로 제기된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임야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소송이었다. 이 재판에서 이우영 회장이 지난달 19일 승소한 사실이 약 3주 뒤에 전해진 것이다.

대한민국과 이우영 회장 간의 소송전은 사연이 길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에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뒤, 이우영이 물려받은 이해승 토지 192필지(197만평방미터, 시가 300억원)를 국가에 귀속시키자 이우영은 행정소송을 제기해 2010년에 최종 승소했다. 

2011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귀속법)' 개정을 계기로 국가가 새롭게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우영은 여전히 잘 막아냈다. 2019년 6월 26일 2심 재판부가 원심을 깨고 국가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국가의 전부패소 판결과 다를 바 없었다. 2심 판결에 따라 이우영이 국가에 돌려줘야 할 토지는 4평방미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로·세로 2미터의 토지만 반납하면 됐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6월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광복회 고문 변호사인 정철승 변호사가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 상대 소유권 이전등기 소송 2심 선고가 끝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재판부는 국가가 이해승의 손자를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등기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한 1심을 뒤집고 일부 원고 승소 판결했다.
ⓒ 연합뉴스
 
이해승의 친일 행적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12일 구성됐다. 이 기구가 본격 활동을 개시한 것은 이듬해 1월 5일이다. 초기에 이 기구는 굵직한 친일파들을 붙잡아 들였다. 일례로, 화신백화점 소유자인 박흥식을 1월 8일에,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이 된 최린을 1월 13일에, 저명한 문인이었지만 친일로 돌아선 최남선·이광수를 2월 7일 체포했다.

경찰 간부들이 반민특위법에 반발해 집단퇴진 결의를 천명하고(1948.8.24), 친일파들이 극우세력과 합세해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및 친일청산 반대 집회를 열고(9.23 등등), 그들이 테러리스트 백민태에게 반민특위 관련자 암살을 사주하고(11.17),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촉구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하는(1949.2.15) 등의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한쪽에서는 친일청산이 추진되고 한쪽에서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친일청산을 훼방하는 혼란 속에서 친일파 이해승이 소환됐다. 1949년 2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이범익, 이해승 등 특위 경기분국서 문초'는 반민특위 경기도 분국의 18일 조치와 관련해 "고양군 은평면에 거주하는 전 궁내부대신(원문은 국내부대신으로 오기) 이재순의 양손인 후작 이해승(60)을 21일 상호 10시까지 출두하라는 호출을 하였다"라고 보도했다.

이해승의 거주지인 고양군 은평면은 행정구역 조정에 관한 그해 8월 13일 자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대문구로 편입됐다. 조만간 서대문구 구민이 될 이해승을 붙잡아 '문초'하고자 반민특위 경찰인 특경대가 출동했던 것이다.

1890년에 출생한 조선왕족 이해승의 핵심적인 친일행적에 관해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II권은 일제하에서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을 지낸 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을 지낸 일, 일본으로부터 은사공채 16만 8천 원을 받고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일 등을 열거한다.

조선귀족회장 재직 때 있었던 일에 관해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그가 "1942년 1월 조선귀족회 임시총회에서 일본 육군과 해군에 1만 원씩 헌금할 것을 결의"했다고 한 뒤, 미나미 지로(남차랑) 조선총독의 이임 때도 담화를 발표해 한국인 징병을 찬양했다고 설명한다. 총독부 기관지인 1942년 5월 30일 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조선귀족회장 명의의 '내선일체에 큰 공적'이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찬양했다.
 
남 총독은 작임 이래 내선일체의 실현을 시정의 큰 방침으로 하여 침식을 잊고 조선 통치에 다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인데, 특히 지원병 제도와 징병제도는 글자 그대로 남 총독이 조선 동포로 하여금 충성한 황국신민이 되어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자는 어버이의 마음에서 나온 선정으로서 감사 감각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이렇게 명명백백한 친일행위들을 오랫동안 저지른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그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국민적인 친일청산 열기 속에 반민특위가 이해승을 붙들어 갔지만 친일세력과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 훼방 속에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문제의 제3조 제1항 단서 규정

1949년에 이해승 처벌이 유야무야 됐듯이 오늘날에는 그 재산의 환수 역시 유야무야 되고 있다. 이해승뿐 아니라 여타 친일파들의 친일재산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19일 국가 패소 판결이 내려진 문제의 서울 서대문구 땅은, 일본 정부로부터 16만 8천 원을 상금으로 받은 지 6년 뒤인 1917년 9월에 이해승이 매입한 땅이다. 그 뒤 이 땅은 손자인 이우영에게 넘어갔다. 1966년 경매 처분으로 제일은행에 넘어간 이 땅은 이듬해인 1967년 이우영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 땅에 대해 대한민국 국가가 2019년 서대문구의 문제제기를 계기로 새롭게 환수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한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은 "친일재산은 그 취득·증여 등 원인행위 시에 이를 국가의 소유로 한다"라고 규정했다. 친일재산을 취득하거나 증여하는 등의 법률행위가 발생한 그 시점에 국가의 소유임이 확인된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위 임야는 당연히 대한민국 소유다. 이우영에게 넘어갔을 때도, 제일은행으로 넘어갔을 때도, 이우영에게 되돌아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국가가 패소한 것은 제3조 제1항 뒷부분에 단서 규정이 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선의로 취득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재판부는 "(이우영씨가)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제3자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법률 조문들에 나오는 '선의(善意)로'라는 표현은 '모르고'라는 말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경매처분 이후 이우영 같은 제3자가 친일재산인 줄 모르고 취득했거나 또는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했으면 국가 소유로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야를 재취득할 당시 이우영은 친일재산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3조 제1항 단서가 '제3자가 선의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로 규정됐다면, 이우영은 정당한 대가를 지급했더라도 선의가 아니기 때문에 땅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단서 규정에 '취득하거나'란 문구가 들어감에 따라, 선의가 아닐지라도 대가만 지급했다면 재산을 내놓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광복회 회원들이 23일 서울행정법원 일대에서 친일재산 국가환수 패소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광복회는 이날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지난 15일 대법원이 `친일재산' 가운데 가장 액수가 큰 조선왕족 이해승의 300억원대 토지에 대한 국가귀속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한 것은 "명백히 재고해야 할 중대 사안"이라면서 "친일재산 승소 저지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2010.12.23
ⓒ 연합뉴스
 
친일재산이 일반 재산보다 더 강력하게 보호 받는 이상한 법체계

우리나라 민법에서는 부동산 등기의 공신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등기부 기재 사항을 신뢰하고 부동산을 매입했더라도, 진정한 소유자에게서 매수한 게 아니면 매수인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부동산 선의취득이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수인은 등기부에 기재된 외관뿐 아니라 소유권의 실태를 꼼꼼히 확인한 뒤 부동산을 매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동산 선의취득이 인정되지 않는 것이 우리 민법학의 기본 상식이라는 점은 민법 교과서들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지원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민법강의> 제9판은 "민법은 등기의 공신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동산에 관하여는 선의취득을 규정함에 반하여, 부동산에 관하여는 이에 상응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라고 설명한다.

물론 우리 민법에서 부동산 선의취득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예외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위의 제3조 제1항 단서다. 친일재산에 관한 한, 등기부를 신뢰하고 부동산을 매수한 사람을 보호해주는 한편, 친일재산인 줄 알면서도 매수한 사람을 보호해주는 특별한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일반 부동산 매매에 비해 '친일 부동산' 매매가 더 강도 높은 법적 보호를 받고 있는 셈이다.

제3조 제1항 단서가 여타의 민법 규정과 충돌한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이미 거론됐다. 2010년에 <법학논집> 제15권 제2호에 실린 김지원 이화여대 연구교수의 논문 '친일재산의 토지를 취득한 선의의 제3자'가 그중 하나다.

이 논문은 "(친일) 토지를 취득하는 선의의 제3자가 제기한 국가귀속 결정처분에 대한 소송은 승소율이 높은데, 이는 특별법 제3조 제1항 단서가 부동산의 선의취득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친일재산 환수소송에서 친일파 후손의 승소율이 높은 이유는 바로 그 단서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런 뒤 "우리 민법은 부동산의 등기의 공신력을 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부동산에 대한 선의취득을 인정하지 않지만, 특별법은 제3조 제1항 단서에서 부동산 등기의 외관을 신뢰하여 거래한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고 있다"며 "특별법에서 보호되는 선의의 제3자는 특별법 시행일 전에 친일재산을 취득한 자뿐만 아니라 특별법 시행일 이후에 친일재산을 취득한 자도 포함되고 있다"며 친일재산귀속법이 친일재산 거래를 두텁게 보호해주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번에 이해승 친일재산 환수 소송의 패배를 초래한 결정적 요인은 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 단서다. 친일재산귀속법이 친일재산 환수를 수월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까다롭게 하는 것은 이 법의 존재 의의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친일재산이 일반 재산보다 더 강력한 보호를 받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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