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발로 하는 투표'를 한다
세계 2위 석유 에너지 기업인 로열더치셸이 본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영국 런던으로 옮기겠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셸은 지분 구조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본사를 이전한다고 했지만, 언론 등은 셸이 네덜란드의 규제를 피해 영국으로 간다고 해석한다. 네덜란드 법원은 로열더치셸에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45%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하도록 명령했다. 석유 가스 기업인 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도한 규제였고, 결국 셸은 네덜란드를 떠나는 것으로 응답한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관련된 자기 의견을 표시하는 것은 선거다. 선거에서 표를 행사하고, 언론 등에서 자기 의견을 주장하며 지지자를 늘린다. 그런데 기업과 같은 경제 주체는 선거를 통해 자기 의견을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기업은 ‘발로 하는 투표(voting with the feet)’를 통해 의견을 표시한다. 사업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사업을 접고, 사업하기 쉬운 환경에서 사업 활동을 하는 것이다.
경제학에 티부(Tiebout) 모형이 있다. 각 지자체는 주민들을 위한 여러 제도를 실시하는데, 주민들은 지자체에 대해 ‘발로 하는 투표’를 한다. 자기에게 유리한 제도를 시행하는 지자체에 거주지를 정한다. 지자체는 주민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으니, 주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더 좋은 제도를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
원래 티부 모형은 한 국가 내의 지자체에 적용하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세계화하면서 티부 모형은 국가 간에도 적용된다. 주민과 기업들은 여러 국가 중 자기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 네덜란드 대표 기업이었던 셸이 영국으로 이전하는 것은 이런 ‘발로 하는 투표’가 국제적으로 일상화돼 있음을 시사한다.
‘발로 하는 투표’는 한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9월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20조원 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왜 한국에 짓지 않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어야 할까? 미국이 삼성에 지원하는 내용을 보면, 삼성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삼성에 몇 십 년간 토지 재산세를 감면해주고,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한다. 기업으로서는 한국보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삼성은 ‘발로 하는 투표’를 통해 미국에 공장을 짓기로 선택한 것이다.
사실 삼성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은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한다. 그런데 정말로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국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지난 10년 사이 두 배가 훨씬 넘게 늘었다. 2019년 1년간 투자한 금액만 600억달러(약 71조원)가 넘는다. 지금 한국의 기업들은 ‘발로 하는 투표’를 하면서 해외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내 기업 활동이 좀 더 쉽도록 하지 않는 한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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