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참정권' 너무 인색한 일본..주민 투표권에 '혐오 선동'

김소연 2021. 12. 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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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5만 도쿄 무사시노시
외국인에 주민투표 허용 조례안에
극우세력, 반대시위·혐오 글 뿌려
자민당 의원까지 반중정서 자극 반대론
기초단체 1741곳 중 43곳만
외국인에 주민투표 참여 자격 줘
한국 등 38개국, 지방선거 투표권 인정
지난 4일 극우 정당인 ‘일본제일당’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무사시노시 외국인 주민투표 조례 결사반대’라는 펼침막을 들고 도로 행진을 하고 있다. 100명 이상의 경찰(오른쪽 제복)이 동원됐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외국인 참정권을 인정하는 조례는 철폐돼야 한다. 무사시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로 확대될 수 있다.”

지난 4일 오후 2시 일본 도쿄도 무사시노시 이노카시라 공원. 사쿠라이 마코토 전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회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극우 정당 ‘일본제일당’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를 끝낸 100여명(주최자 집계)은 30분 뒤 ‘무사시노시 외국인 주민투표 조례 결사반대’라는 펼침막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행진 대열이 기치조지 삼거리에 도착할 즈음 이들의 혐오 활동에 반대하는 이들의 기습 시위가 시작됐다. ‘헤이트 스치피’(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혐오 발언)에 반대하는 ‘카운터 행동’(반대행동)에 나선 시민들은 “외국인도 함께 사는 주민이다”, “차별을 그만두라”고 외쳤다. 주말을 맞아 외출에 나선 인파까지 합쳐지며, 기치조지역 근처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 소동이 벌어진 원인은 시가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외국인에게도 투표권을 인정하는 조례 제정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시는 5년 넘는 논의 끝에 18살 이상의 시민으로 주민등록을 한 지 3개월이 지난 이에겐 국적에 상관없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주민투표 조례안’을 만들어 지난달 19일 시의회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외국 유학생이나 기능실습생도 자기 마을의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마쓰시타 레이코 시장은 기자회견에서 “주민투표에서 외국인을 제외하거나 재류 기간을 제한할 특별한 합리성을 찾지 못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시의회는 21일 본의회를 열어 조례안을 처리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1일 현재 시의 인구는 14만8142명으로 외국 국적자는 약 2%인 3098명이다.

지난 4일 무사시노시에서 ‘헤이트 스치피’(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혐오 발언)를 반대하는 ‘카운터 행동’(반대행동)에 나선 시민들은 극우 정당인 ‘일본제일당’에 맞서 기습 시위를 벌였다. 골판지 피켓에는 ‘차별 그만둬’라고 적혀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그러자 우익 단체뿐 아니라 집권 자민당까지 나서 조례안 철회를 촉구했다. 사토 마사히사 자민당 외교부회장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마음만 먹으면 무사시노시 (인구) 15만명에서 과반수인 8만명의 중국인을 일본으로 오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적었다. 일본 내 ‘반중 정서’를 악용해 공포를 조장한 것이다. ‘외국인이나 마피아 집단이주’, ‘한국인 야쿠자…’, ‘주민이 아닌 사람도 투표 가능’ 등의 거짓 내용이 담긴 유인물도 시내 곳곳에서 뿌려지고 있다. 일본 최대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도 지난 2일 사설에서 “오래 거주하지 않은 외국인이 일본인의 생각이나 습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운동을 하거나 표를 던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2006년 가나가와현 즈시시, 2009년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에도 비슷한 조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외국인이 대거 급증한 사례는 관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경제 규모(세계 3위)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할 때 외국인 참정권 인정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국회입법조사처의 ‘외국인 지방참정권 현황과 시사점’(2021년)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외국인 참정권을 둘러싼 논점’(2008년) 등의 보고서를 보면, 한국·스웨덴·러시아 등 38개국은 지방선거에서 외국인 투표권을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선 재일동포들이 지방자치 단체장·지방의회 의원을 뽑는 지방선거 투표권을 요구하며 소송까지 진행했지만 1995년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도 입법을 통해 외국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이 헌법상 금지돼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일본에선 지방선거 투표권은 물론 주민투표 도입도 매우 저조한 편이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1741곳 중 주민투표제를 도입한 것은 78곳, 이 중에서 43곳만이 외국인에게 투표 자격을 주고 있다.

반면 심각한 저출산·고령화로 외국인 노동자의 필요성이 계속 커지고 있다. 일본 출입국재류관리청 자료를 보면, 등록 외국인은 2012년 203만명에서 2019년 293만명으로 90만명이 늘었다. 스가와라 신 난잔대학 교수(법학)는 <엔에이치케이>(NHK) 방송 인터뷰에서 “일본 사회가 다문화 공생의 방향으로 가는 이상, 외국인 주민을 지방 행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며 “외국인들이 주민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법률상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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