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산타클로스는 상표가 없다
"에이, 모자에 상표라니, 가짜죠?" 하던 아이 "오늘만 믿어줄게요"
어쩌면 크리스마스는 믿어주는 날, 서로 귀한 믿음을 선물하는 날
산타클로스를 만난 적은 없지만 산타클로스를 연기한 적은 있다. 연극을 하고 싶어서 극단을 만들었지만 무대에 설 기회가 많지 않았다. 우리의 공연을 찾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결혼식, 칠순 잔치, 회사 단합대회, 대학 신입생 환영회, 음식점 신장개업, 마라톤대회와 자전거대회 등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와 장소를 안 가릴수록 공연 요청이 많아졌다.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공연을 본 누군가가 칠순 잔치 공연 의뢰를 하고, 그 칠순 잔치에서 공연을 본 누군가가 회사 단합대회 공연 의뢰를 하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우리는 몇몇 유치원의 산타클로스 의뢰를 받게 되었다.
산타클로스라니, 이 거룩한 분을 우리가 연기할 수 있을까. 이 배역은 대체 누구한테 조언을 받아야 할까. 놀랍게도 바로 옆에 있었다. 내가 유치원에 다녔던 시절, 아버지가 산타클로스로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내 친구들을 한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한 뒤에, 그 아이들의 장점을 감쪽같이 알아맞혔다. 그래 너는 책을 좋아해서 어딜 가나 들고 다닌다지. 그래 너는 맛있는 게 있으면 동생과 꼭 나눠 먹는다지. 그래 너는 이번 할머니 생일 때 노래를 불러서 할머니가 참 행복했다지. 우리는 그때마다 “와!” 소리 지르며 뜨겁게 박수 쳤다. 칭찬도 받고 선물도 받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버지에게 빠져들었다. 우리 아빠가 정말 산타클로스였나? 잠시 후 선물포장을 뜯으며 알게 되었다. 포장지에 붙은 포스트잇에 우리의 장점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었다는 걸. 만약 포스트잇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꽤 오랫동안 산타클로스를 믿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유치원 친구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포스트잇만 붙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우리는 용기를 냈고, 유치원에 미리 문의해서 친구들의 장점을 하나하나 대본처럼 외워나갔다. 절대로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기 위해서.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고, 나는 사회자가 되어 유치원 친구들 앞에서 소리쳤다. “여러분! 산타할아버지가 지금 막 이곳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천장이 날아갈 듯한 환호와 함께 우리 극단의 배우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등장했다.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불러서 장점을 말해주고, 선물을 주고, 아이들은 행복에 겨워 방방 뛰어다니고, 시대는 2000년대를 달려가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동심은 1980년대와 똑같았다.
뭉클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아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가짜죠?”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 “보면 모르니, 진짜 산타할아버지란다.” 그 아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에이, 모자에 상표가 있는데.” 그제야 보았다. 산타 모자에 붙어있는 모 이벤트 업체의 상표를.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모르는데, 그 아이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걱정 마요. 오늘 하루만 믿어줄게요.” 나도 그 아이의 귓가에 극존칭으로 속삭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아이 덕분에 우리는 산타클로스를 감쪽같이 연기할 뻔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유치원을 떠나려는데 영수증을 내밀며, 거기 사인을 해야 입금이 된다고 말씀하신 원장 선생님만 아니었다면. 아이들은 어느새 빙 둘러서서 우리의 산타가 영수증에 이름과 계좌번호를 적는 것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말에 산타도 용기를 얻어 수염을 벗으며 소리쳤다. “믿어줘서 고마워!” 아, 그러고 보니 내 친구들도 딱 하루만 믿어주었던 걸까. 우리 아버진 줄 알면서. 어쩌면 포스트잇도 친구들이 몰래 떼어서 버렸던 걸까. 아버지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막아주기 위해서. 그럼 친구들이 산타를 믿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친구들을 믿었던 걸까.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는 어쩌면 그런 날일까. 믿는 날이 아니라 믿어주는 날.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딱 하루 귀한 믿음을 선물하는 날.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온다. 설레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선물할 믿음을 포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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