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낯설게 보기] '삶의 현장'으로서의 학교
[경향신문]
텔레비전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체험, 삶의 현장>은 밥벌이의 고단함과 소중함, 노동하는 삶의 가치를 얼핏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연예인이 하루 동안 육체노동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한두 시간 맛보기에 그치지 않고 종일 땀 흘리며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 ‘체험’이라 이름 붙이기에 부끄럽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들의 체험학습은 대개 한두 시간 ‘해보는’ 데 그친다. 짧은 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해볼 수 있게 다양한 편법을 써서 그야말로 ‘맛보기식’ 활동을 한다. 수확철에 감자를 한두 시간 캐보는 걸로 농사체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농부의 일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가치 있는 일은 한두 시간 체험한다고 그 가치를 경험할 수 없다. <전쟁과 평화>를 요약본으로 읽고서 가치를 알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삶과 동떨어진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체험학습이 아이들을 삶에서 더 떼어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은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에서 펼쳐진다. 멀리 가서 별난 경험을 해야만 체험학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체험학습을 했지만 정작 제 손으로 걸레를 빨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 많다. 걸레를 비틀어 짜거나 비질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아이가 드물다. 오늘날 많은 학교들이 청소를 용역에 맡기는데, 이는 중요한 교육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학교 바깥에서 뭔가를 찾기 전에 발밑을 먼저 살필 일이다.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다.
중요한 인간관계가 일어나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현장이다. 학교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있으므로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좋은 교사도 교사답지 않은 교사도 있고, 마주치기 싫은 친구도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친구도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 아이들의 성장에 매우 ‘교육적인’ 환경이다. 이런 환경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삶의 교육’을 찾아서 학교 바깥을 헤매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사건도 인간관계의 갈등을 푸는 학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학교폭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을 교육적으로 풀지 못하는 ‘교육적 무능’이 문제다.
많은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수업시간이나 시험보다 친구관계다. 일터에서도 인간관계의 껄끄러움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이 더 많듯이,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친구관계로 힘들어 한다. 이를 교육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학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 활동이다. 민주시민교육의 핵심도 여기 있다. 학교야말로 아이들에게는 ‘체험, 삶의 현장’인 것이다. 교사에게 일터인 학교는 더욱이 ‘삶의 현장’ 그 자체다. 교직의 애환을 동료들과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는 곳이 되어야 마땅하다.
“노동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 카뮈의 이 말을 교사의 노동에 대입시켜 보자. 아이들을 만나는 일에 영혼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방학 때 해외여행 가는 낙으로 교직에 몸담고 있다면 교사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멀고 낯선 곳에서 짜릿한 경험을 하는 것이 지루한 삶에 청량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의 삶이 지루하다면 그곳에서의 삶도 사실은 비슷할 것이다. 잠깐 동안의 신기한 볼거리가 삶의 질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아이들과 교사들이 낮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는 배움터이면서 동시에 삶터이자 일터다. 학교가 단순히 수업을 하는 곳이 아니라 삶터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 진정한 삶의 교육, 배움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교사들이 삶의 보람을 느끼고, 아이들이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배움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가능성 역시 학교 안에 있다.
일상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서 삶의 교육은 시작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당분간 해외여행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참에 일상에 좀 더 천착해보는 것은 어떨까?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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