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없다" 대놓고 험담에 욕설..죽음 부르는 간호사 태움, 왜?
전문가 "인력부족 원인, 환자 수 법제화를"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 1년 차 간호사인 김모(23·남)씨는 7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더 이상 태움의 희생자가 나와선 안 된다”며 "법을 바꿔서라도 태움 악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움’은 간호사 선배가 후배를 교육할 때 괴롭히는 악습의 은어다.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우고 태운다’는 의미가 담겼다.
2018~2019년 고 박선욱, 서지윤 간호사에 이어 지난달 을지대병원 간호사까지 태움으로 고통받다 세상을 등지자 앞에 나선 김씨는 그 역시 올해 입사 초기 태움으로 수치심과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5월쯤 함께 근무하던 선배 간호사 2, 3명으로부터 욕설과 함께 ‘눈치가 없다’,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애’ 등의 험담을 들었다. 그는 “내가 옆에 서 있는데, 내 험담을 해 상처가 컸다”며 “30분 걸리는 근무 인수인계도 별별 트집을 잡으면서 해주지 않아 3개월가량은 2시간씩 늦게 퇴근했다”고 말했다.
간호사들이 태움으로 고통받기는 개인 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간호사 최모(24·여)씨는 2년 전 의정부의 한 작은 병원에서 일할 당시 운영실장으로부터 반년 가까이 괴롭힘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이 기분 나쁘면 평소엔 그냥 넘어가던 것도 꼬투리를 잡아 윽박지르면서 혼을 냈다”며 “다른 동료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외모 비하 발언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16일 숨진 채 발견된 의정부 을지대병원 신입 여성 간호사 A씨(23) 사건을 계기로 태움 관련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 간호사는 살인적인 격무와 함께 상습적인 태움 피해를 호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온라인에도 태움 피해 호소 글이 이어지고 있다. 경기 성남의 한 신규 간호사는 1일 간호사들의 익명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올린 글에서 “어젯밤 고참 선생님이 4년 차 선생님을 보면서 ‘야, 너 나한테 인사 안 해?’’라고 소리 지르며 개인적 스트레스를 태움으로 푸는 것을 봤다”며 “나도 저런 일을 당할 것 같아 출근하기 두렵다”고 썼다.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했다는 간호사는 "전에 다니던 병원에서 ‘너 언제까지 병원 다닐 거냐’ 등의 태움을 당하다 결국 그만뒀다”며 “이후 우연히 거리에서 저를 태운 그들을 봤는데 식은땀이 나며 심장이 쿵쾅거렸다”고 적었다.
또 다른 간호사는 1년 전 태움으로 그만둘 때 "병원 내 괴롭힘을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썼던 ‘비밀유지의무 확약서’를 올리며 당시 고충을 전했다.
전문가와 간호사들은 태움의 원인을 병원의 구조적인 문제로 꼽는다. 병원의 이윤 극대화에 묻혀 만연한 간호 인력 부족이 이 악습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갓 입사한 간호사들은 불과 한두 달 교육받고 업무 숙련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현장에 투입된다. 경력 간호사들은 업무 과중으로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업무 처리가 미숙한 신입 훈련까지 책임져야 해 공격적인 말을 내뱉는 등의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신입 간호사들의 사직률이 높은 것도 이런 구조와 무관치 않다. 병원간호사회 등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의 1년 미만 간호사 사직률은 45.5%로 타 산업 평균 이직률(4.8%)보다 10배 가까이 높다.
을지대병원 간호사도 숨질 당시 7개월 차 신입이었지만, 담당 환자는 23명에 달했다. 을지대병원과 같은 간호등급 최상위인 1등급 상급 병원 간호사는 15명 안팎이다. 보건의료노조는 살인적인 업무강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력부족에 교육이 덜 된 신입이 현장에 투입되고, 책임은 경력 간호사에게 지워지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한 태움 문화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도 법제화 필요성을 지적한다. 송금희 전국보건의료노조 사무처장은 “간호사 1인당 담당 환자 수를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신입 교육은 별도 전담 인력에게 맡겨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소남 서정대 간호학과 교수는 “대학병원의 간호사 1명당 적정 환자 수는 10명인데, 40명까지 돌보는 경우도 있다”며 “정부가 병원들이 적정한 인력을 운영할 수 있도록 의료 수가 인상 등의 대안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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