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술도녀' 미깡을 만나려면

박미향 2021. 12. 8. 19: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편집국에서]

<술꾼도시여자들>. 티빙 제공

[편집국에서] 박미향

문화부장

“딱 1시간만?” 술 한잔하자는 소리다. 0.2초 만에 승낙 메시지를 보낸다. 회사 ‘절친’이 해 질 녘 자주 보내는 문자메시지에 뜨겁게 호응하는 이유는 직장생활의 노곤함을 푸는 데 ‘퇴근주’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퇴근주는 달다. 어른만이 아는, 달근달근한 맛이다. 요즘 이런 마음이 드는 이가 많나 보다.

최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오티티)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술꾼도시여자들>(이하 ‘술도녀’)이 화제다. 20~30대를 제대로 공략한 ‘술도녀’는 일도, 생각도 다른 세 여자가 퇴근 후 마시는 술 이야기로 시작한다. 교사였지만 제자의 죽음에 책임을 느껴 사직하고 종이접기 유튜버로 나선 강지구(정은지), 회장의 치근덕거림을 나름의 방식으로 대처하고 뛰쳐나온 요가 강사 한지연(한선화), 클라이언트에게 팩트 폭격을 날려 해고된 뒤 방송작가로 전업한 안소희(이선빈). 이들은 매일 술을 마신다. 수위 높은 아슬아슬한 19금 대사와 찰진 욕, 애주가 허영만도 압도당할 만한 엄청난 양의 퇴근주 때문에 고도주 섭취만큼 빠르게 취하지만, 곧 이 드라마의 인기 요인이 다른 데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동안 ‘우정’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군 위문 예능 프로그램의 이름이 <우정의 무대>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어린 시절 우정을 뜻하는 ‘불×친구’가 버젓이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란 말도 여전히 돈다. 여성의 우정을 다룬 콘텐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여성을 옥죄는 사회문제에 천착해 연대에 초점을 맞췄다. ‘술도녀’는 달랐다. ‘섬세하게 들여다보기’ 신공을 펼쳐 일상에 촘촘히 스며 있는, 여성조차 몰랐던 여성들의 우정을 제대로 드러냈다. 여기에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여성 대상 범죄, 직장 내 갈등, 세대 간 마찰 등을 양념처럼 얹어 공감을 배가시켰다. 술은 그저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일 뿐이다. 이 모든 내러티브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단언컨대 원작의 힘이 컸다.

‘술도녀’는 웹툰 작가 미깡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카카오웹툰에 연재한 <술꾼도시처녀들>이 원작이다. 73만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누적 방문자만 1억명(8일 기준)이 넘는다. 연재 초기 35살이었던 미깡은 주인공 정뚱, 꾸미, 리우를 자신과 동갑으로 설정해 그 또래 여성들의 서사를 조밀하게 그렸다.

팬데믹 이후 전세계 영상 콘텐츠 시장이 오티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확대되면서 똘똘한 원작 사냥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이미지가 동반되는 웹툰을 주목하는 제작자가 많다. 케이(K) 콘텐츠의 ‘보고’란 말도 나온다. 이미 이를 증명한 사례는 넘친다. <디피>(D.P) <지옥>과 전세계 넷플릭스 2위에도 올랐던 <연모>도 웹툰이 원작이다. <이태원 클라쓰> <경이로운 소문> <스위트 홈> <유미의 세포들> 등 셀 수가 없다. 이런 추세에 걸맞게 웹툰 시장의 성장은 가파르다. 교보증권 보고서 ‘웹툰이 곧 글로벌 흥행 아이피(IP)’를 보면 2020년 웹툰 시장의 규모는 1조원으로, 2013년에 견줘 7배 성장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닐 듯싶다. 성장이 작가들의 바람이나 이익과 연결되고 있을까. 다수의 웹툰 작가와 평론가들은 “아니다”라고 한다. 제2·3의 미깡이 탄생하려면 선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고 한다. 선인세 개념의 ‘미니멈 개런티’ 문제, 공장형 작가 시스템의 폐해, 과중한 노동시간, 불법 웹툰 사이트의 베끼기 범죄, 표준계약서의 의무화 등. 그중에서 작가들이 최우선으로 꼽는 숙제는 에이전시 기업들과 공정한 관계 설정이다.

2010년대 들어 에이전시 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이들의 수익은 매년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스타 작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에이전시 기업의 주문에 속절없이 복무해야 한다. 대형 플랫폼과 계약을 무기 삼는 곳이 많고, 계약 내용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양질의 기업은 소수다. 이렇다 보니 콘텐츠 오픈 마켓 ‘포스타입’ 등에 직접 창작물을 올리는 작가도 생겨나고 있다.

작가들은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생태가 과연 이런 것이었나’ 그들의 탄식에 마음은 먹먹해진다. 아직 기회는 있다. 굳어지기 전에 생태계를 다듬어 제2·3의 미깡 탄생이 당연한 환경이 되도록 만들면 될 터이다.

m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