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한 서류엔 '일 소홀히 하면 불법체류자 만들겠다' 쓰여있었다

김승환 2021. 12. 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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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인 농가 노동실태 공개
'일 소홀히 하면 불법체류자 될 것'
근로동의서에 불공정 조항 가득
농축산 종사자 절반 주7일 근무
70% "하루 10시간 이상 일" 답변
"계약 해지 시 강제출국 인권 침해
사업장 변경 권한 법으로 보장을"
경남 밀양시 한 깻잎 농장. 양산외국인노동자의집 제공
‘하루 근무시간 중 마흔 바구니를 따야 한다. 한 바구니는 1㎏ 이상이 돼야 한다.’

경남 밀양시의 한 깻잎 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A씨는 지난달 농장 주인으로부터 이런 내용이 담긴 서류(동의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하루 작업 할당량으로 정한 마흔 바구니를 채우지 못하면 바구니당 1500원을 급여에서 삭감한다고 했다.

A씨는 최근 할당량 문제로 고용주와 갈등하다 사업장에서 쫓겨났다. 이후 고용주가 관할 출입국사무소에 A씨에 대해 소재불명이라고 신고하면서 A씨의 체류자격은 현재 불투명해진 상태다. 그가 서명한 서류에는 ‘일을 소홀히 하면 사장이 쫓아내 불법체류자로 만들 것이다’, ‘직원들은 항의할 권리가 없다’ 등의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인권단체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대표는 8일 국회에서 열린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안전보건 및 노동권 실태와 과제’ 토론회에서 이 같은 이주노동자 상담 사례를 공개했다.

지난해 12월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가 한파 속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생활하다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농축산업 부문 이주노동자는 A씨 사례처럼 끔찍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건 당시 정부가 이주노동자 숙소 지침을 개정하는 등 일부 개선 움직임을 보였지만 현장에선 부당한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이진우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노동자건강증진센터장(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은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3명 중 1명 가까이가 일주일 중 하루도 쉬지 못한 채 노동하고 있다는 내용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농축산업 종사자의 경우 절반 이상이 ‘주 7일 노동’을 하고 있었다.
지난 8월13일부터 10월19일까지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주간 노동일이 ‘7일’이라는 응답 비율은 29.5%(18명)에 달했다. ‘6일’이란 답변도 31.1%(19명)이었고, ‘1∼5일’은 39.3%(24명)였다. 이들 중 농축산업 종사자의 경우 주 7일 노동 비중이 54.8%(17명)로 제조업(3.6%) 대비 월등히 높았다.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하는 비율도 농축산업 종사자가 69.7%로 제조업(28.6%)보다 2배 이상이었다.

이들 응답자 중 20% 이상은 본인의 건강 상태에 대해 ‘나쁜 편’이라고 답했다. 주관적인 건강상태를 물은 결과 ‘보통’이란 답변이 65.1%(41명)로 가장 많았고, ‘나쁜 편’(‘매우 나쁘다’ 포함)은 22.2%(14명), ‘좋은 편’(‘매주 좋다’ 포함)은 12.7%(8명)였다. 사고로 결근한 적 있는 응답자는 28.6%(18명), 질병 때문에 결근한 적 있다고 답한 비율은 42.9%(27명) 수준이었다.

아파서 근무를 쉬는 건 그나마 나은 경우다. 응답자 2명 중 1명 이상(55.6%)은 아픈데도 일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근무지 내에서 폭력을 경험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응답자 중 50.8%(복수응답)가 최근 한 달 내 언어폭력을 당한 적 있다고 답했다. 모욕적 행동 경험은 39.7%, 위협 23.8%였으며 신체적 폭력도 20.6%나 됐다.

이주노동자단체 측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권한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외국인고용법 25조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직장을 옮기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먼저 근로계약을 해지하려 하거나 갱신을 거절하는 경우 등 요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지림 변호사는 “법이 정한 사유 외에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불허하고, 이를 용인하지 않으면 출국하게 하는 식의 법 집행은 직업 선택의 자유와 근로권을 침해하는 동시에 명백한 강제노동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해당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된 상태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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