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 속헹씨 사망 1년..캄보디아 이주노동자 10명 중 4명은 '우울군'

이혜리 기자 2021. 12. 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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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주노동자 기숙사 산재사망사건 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해 12월28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농장 비닐하우스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의 산재사망 진실 규명과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이준헌 기자


한파가 몰아친 지난해 12월20일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잠을 자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이후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고, 정부는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10명 중 4명은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강은미·윤미향 의원 주최로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안전보건 및 노동권 실태와 과제 토론회’에서 이진우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노동자건강증진센터장이 이같은 내용의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센터장은 지난 8~10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63명을 상대로 심층 면접과 우울증 선별검사를 진행했다.

조사 참여자 중 우울증 위험이 있는 ‘우울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40.3%에 달했다.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수준인 경우도 11.3%였다. 2018년 질병관리청의 국민건강영양조사에서 우울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10점 이상의 비율이 여성은 6.1%, 남성은 2.5%로 나타났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각각 52.5%, 19.1%로 훨씬 높았다.

업종별로 분류하면 농·축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우울군 비율이 63.6%로 제조업(14.8%)에 비해 높았다.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비율은 18.2%였다. 조사 참여자의 54.0%는 불안감이 있다고 했고, 50.8%는 우울감이 있다고 답변했다. 이 센터장은 “이번 조사 참여자들은 우울증 증상 유병률이 13배 정도 높고, 특히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는 20배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고 했다.

아파서 병원에 가고 싶었는데 갈 수 없었던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조사 참여자의 55.7%는 그런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병원에 가지 못한 이유(복수응답)로는 ‘병원에 가도 의사소통이 안될 것 같아서’(34.9%),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31.7%), ‘병원이 어디 있는지 모르거나 어떻게 가야하는지 몰라서’(23.8%)가 주로 꼽혔다.

장시간·저임금 노동은 여전히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참여자 중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 이하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경우는 35.0%에 불과했다. 10시간을 초과해 일하는 경우가 40.0%였다. 평균 노동시간은 9.8시간이었는데,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경우 10시간을 초과하는 경우가 58.7%로 더 높았다. 주 5일 근무를 한다는 답변은 39.3% 뿐이었고,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는 답변이 29.5%였다. 농·축산업 노동자는 일주일에 6.1일 이상 일하는 경우가 54.8%로 과반 이상이었다. 조사 참여자의 월 평균 임금은 189만7000원으로,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는 비율이 49.2%나 됐다. 농·축산업 이주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 제63조에 따른 노동시간·휴게·휴일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 센터장은 “실태조사를 진행하며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농·축산업 환경은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열악하고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여러가지 건강문제를 가까스로 견뎌내고 있다”고 했다.

토론회에 참여한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센터장은 “속헹씨 사망 후 법·제도가 바뀌었는데 적극적인 행정이 작동하지 않아 여전히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며 “한국 사회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이주노동자에게 얼마나 많이 기대고 있었느냐가 확인되고 있지만 노동권 확장보다는 더 착취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이찬 지구인의 정류장 대표는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곳은 (근로기준법이 일부만 적용되는) 5인 미만 사업장이 많아 노동자들이 연차수당조차 제대로 못 받고 있다”며 “(이들 농·축산업 사업장은)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산재보험법 적용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김형숙 고용노동부 외국인력담당관실 사무관은 “산재보험을 가입한 사업장에만 고용허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외고법(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입법예고를 다음달 하려고 추진 중”이라며 “인권과 산업안전 교육을 강화하고, 근로감독관과 합동점검을 통해 임금체불과 산업안전 상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사무관은 또 “전국의 고용센터에 166명의 통역원을 두고 있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인 만큼 사업장 지도점검 시 외국인 노동자와의 면담, 산재·해고 등 진정사건이 있을 때 통역 지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윤미향 의원은 “안전과 노동권 보호망에서 벗어난 소규모 농·축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에게 정부의 부실한 관리·감독으로 빚어지는 피해는 더욱 크고 깊다”며 “이주노동자의 안전 대책을 강화하기 위한 걸음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해 이주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용자에 대해서는 고용허가를 제한하는 법안을 곧 발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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