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직전 노사 합의 SBS, '극적 타결'인가 '아쉬운 싸움'인가

김예리 기자 2021. 12. 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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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예고시점 지나 합의, 대의원 68명 중 62명 찬성 통과
사장 빼고 보도본부장과 시교·편성 국장만 임명동의, '아쉽다' '피 안 흘린 최선 결과'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는 지난 6일 0시 창사 이래 첫 파업을 예고했다. 임명동의제 사수와 무단협 사태 해결을 내건 파업에 조합원 91.4%가 투표해 86.6%가 찬성했다. 노조에 따르면 역대 최고 참여율과 찬성률이다. 정형택 언론노조 SBS본부장은 조합원 편지에서 “파업이 공정방송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자 소중한 우리 일터의 갈등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했다.

파업 예고 시점을 넘긴 6일 0시7분, SBS 노사가 잠정 합의문에 서명했다. SBS는 보도본부 파업에 대비해 메인뉴스를 기존 70분에서 40분으로 축소하고 나머지 보도 프로그램은 모두 드라마와 예능 재방송으로 대체하려던 참이었다. 앞서 SBS본부는 5일 저녁 7시께 사측과 막판 협상을 시작했고, 11시40분께 합의문을 작성하며 파업 지침을 보류했다. SBS는 자정을 넘겨 이날 편성표를 되돌렸다. 노사는 7일 조인식을 진행했다.

임명동의 대상에서 SBS 사장과 SBS A&T 사장을 제외하고, 공정방송 부문 중 시사교양과 편성 책임자 임명동의 대상을 본부장에서 국장으로 격하한 것이 합의의 골자다. 대주주와 사측에 대한 견제장치가 후퇴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꼽힌다. 이번 합의는 '아쉽게 진 싸움'으로 봐야 할까. 혹은 '저지선을 최대한 확보한 뒤 맺은 극적 타결'로 봐야 할까.

노사 합의 어떤 내용 담았나


노사가 서명한 합의안을 보면 노사는 단체협약의 임명동의 대상에서 SBS와 SBS A&T 사장을 제외하기로 했다. 가장 큰 변화다. 기존 임명동의 대상인 공정방송 책임자 가운데 보도본부장은 사수했지만, 시사교양·편성 본부장의 경우 각 부문 국장으로 임명동의 대상의 수준을 낮췄다. 각 국원의 60%가 반대하면 임명을 철회하기로 했다. 대신 보도·시교·편성 본부장 긴급평가제를 도입키로 했다.

SBS A&T 보도영상본부장에도 중간평가제와 긴급평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2008년에 도입됐지만 노사 갈등이 악화하면서 사측이 임의로 중단했던 노조 추천 사외이사 제도도 조속히 복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정형택 SBS본부장은 합의안을 두고 “파업이라는 극단적 갈등 상황은 피하면서도 훼손된 공정방송 제도를 최대한 담보할 수 있는 대안적 제도를 도입한 것”이라며 “노조는 기존 제도가 후퇴했다는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며, 앞으로도 더욱 정교하고 진일보한 제도가 마련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정형택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장과 박정훈 SBS 사장이 7일 오후 3시 SBS 20층 대회의실에서 '2021 노사 합의문'에 서명한 뒤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SBS 제공

보도본부장과 시교·편성 국장만 임명동의제, 영향은


사측이 합의문까지 관철한 핵심 사안은 사장 임명동의제 폐기다. 대주주인 태영건설의 TY홀딩스가 SBS 사장 임명권을 지닌 상황에서 사장 임명 동의제는 방송사 구성원들의 대주주 견제를 의미했다. 지상파 방송사 가운데 SBS가 유일하게 지난 2018년 노사 합의로 단협에 규정한 제도이기도 했다.

임명동의 수준을 낮춘 시사교양과 편성 부문의 경우, 국장의 권한을 어떻게 규정할지도 과제다. 합의문에 따르면 SBS는 시사·편성 부문에서 임명동의제 적용할 '국장'의 책임 범위를 노조와 합의해 단협과 사규에 명시하기로 했다. 기존에 본부장이 지녔던 직제개편과 부서배치, 인사 권한을 이양할지 여부는 추후 논의하도록 남겨둔 셈이다. 국장 권한을 보장한다는 취지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당초 합의에 이를 구체적으로 못박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SBS는 2017년 노사 합의로 사장과 공정방송 책임자 임명동의제를 도입했다. 사장과 편성·시사교양 본부장의 경우 재적 인원의 60% 이상, 보도본부장은 해당 인원의 50% 이상이 반대하면 임명할 수 없다. 2017년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윤세영 태영건설 창업주이자 당시 SBS 미디어그룹 회장의 방송 사유화 폭로가 나왔고, SBS는 재허가 심사를 앞두고 소유·경영 분리 조치 가운데 하나로 임명동의제 합의를 맺고 이를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했다.

이후 KBS와 MBC가 SBS를 따라 경영진 임명동의제를 도입하고 KNN을 비롯한 지역민방 방송사들은 SBS 모델을 따라 교섭을 꾀해온 만큼 이번 합의가 다른 방송사들에 미칠 영향은 적지 않아 보인다.

▲서울 목동 SBS 사옥. 사진=김예리 기자

일각에선 사장 임명동의제를 두고 실질적 견제 기능보다는 상징성이 컸다는 의견도 있다. 지난 2017년 임명동의제 도입 과정을 지켜본 한 구성원은 “사장 임명동의제를 도입한 뒤 큰 변화가 없었다. '직원 60% 반대 시 부결' 조건으로 문턱도 높다. 도입 이전 임명된 박정훈 현 SBS 사장의 사내 여론이 나빴는데 현재까지 낙마 없이 연임한 이유”라고 했다.

'전선이 그어진 싸움'이었나


SBS와 SBS A&T 안팎에선 초기부터 전선이 그어진 싸움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당초 사측이 촉발한 갈등이었기에, SBS 구성원으로서 쟁점이 단협·임명동의제를 '빼앗길지, 사수할지'에 머물렀다는 얘기다.

SBS본부는 당초부터 사장 임명동의제를 사수하기 어렵다고 봤다. SBS본부가 지난 10월3일 무단협 사태에 이르기 직전 양보안에 '사장 임명동의제 폐지'를 담되 보도영상본부장과 4개부문 국장을 임명동의 대상으로 추가한 배경이다.

정형택 SBS본부장은 “사측은 사장 임명동의제를 주주권 침해라고 주장해왔다. 법률자문 과정에서 걸렸던 부분이기도 하다. 대표이사 사장까지 공정방송 책임에 대한 부분을 제기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판단에 실질적인 현장의 공정방송 3부문의 책임자에 대한 임명동의를 요구했다”며 “조직의 갈등비용과 조합원의 피해를 견줘 현실적인 협상 가능성을 생각한 결정”이라고 했다.

▲지난 2일 서울 목동 SBS사옥 로비에서 열린 언론노조 SBS본부 파업 결의대회 모습. ⓒ언론노조 SBS본부

조합원 열의, 일부 '아쉬워' “큰 그림은 노조 흔들기”


한편 조합원의 파업 열의만큼이나 집행부가 마련한 합의안에 대한 동의율도 높았다. SBS본부가 최종 합의문을 확정하기 위해 6일 연 임시 대의원회에서 68명 가운데 62명이 찬성, 6명이 반대 의견을 냈다. 이 같은 여론을 두고 복수의 조합원은 미디어오늘에 '결과에 상관 없이 노조 집행부에 힘을 싣겠다는 의미가 크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합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구성원 의견은 다양하다. 미디어오늘이 접촉한 다수 조합원은 '아쉽다'는 평을 내놨다. SBS 기자 A씨는 “개인 의견이지만 아쉬움도 남는다”며 “전반적으로 제도에선 후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양과 편성도 공정방송 핵심 부분인데,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책임지는 본부장에 대한 임명동의 권한을 빼앗겼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교양PD들을 중심으로 이번 합의에 우려 섞인 비판 여론도 있는 상황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는 12일 SBS 대주주인 TY홀딩스 사옥 앞에서 사측의 단체협약 해지와 임명동의제 파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15년차 이상 구성원 B씨도 “하루 이틀이라도 파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SBS에 다니면서 이번만큼 보도국의 참여 열의나 의지가 큰 적이 없었다. 결의대회에 저연차 기자들이 많이 나와서 놀랐다”고 했다.

이들은 한편으로 '파업하지 않고 얻을 최선의 결과를 선택했다'고 했다. B씨는 “노조가 피를 흘리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실을 얻었다고는 생각한다. 만약 싸우기로 결정한다면, 지금 합의안에 절대 만족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 다른 구성원 C씨는 “이번엔 파업에 들어갈 줄 알았다. 실제로 0시 넘어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나”라고 말한 뒤 “2017년 10.13 합의에 비해 분명 한 발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임명동의제와 단협이 모두 무력화된 터라 상황이 악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SBS는 임명동의제를 보도본부장 선으로 후퇴시킨 것 이외에 무엇을 얻었을까. 일각에선 사측의 '노조 길들이기' 의도를 지적한다. C씨는 “멀쩡히 유지해오던 임명동의제를 갑자기 없애자며 들고나왔다는 점에서 노조 흔들기 차원이 컸다고 본다”며 “더구나 사측은 협의를 추구하지 않고 바로 단협 파기를 선언하고, 파업 직전엔 노조 전임자 타임오프·휴게공간 보장까지 없애겠다고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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