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과 겨루는 메가시티를 만들자
지방이 쇠퇴한다, 소멸한다는 이야기는 나온 지 오래됐다. 2002년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제1공약으로 내세운 것은 ‘지역 간 균형 발전’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수도권-지방 사이 불균형 발전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역 쇠퇴는 농촌에서 시작해 중소도시로 확산돼왔다. 농촌은 이제 쇠퇴 수준을 넘어 소멸할 것으로 우려된다. 어떤 농촌에선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농촌의 소멸은 농업이란 보편적인 산업이 소멸함을 보여준다. 농촌의 소멸은 다시 중소도시의 극심한 쇠퇴로 이어졌다. 중소도시의 쇠퇴는 더 이상 농촌에서 유입할 인구가 없고 중소도시가 대도시와의 경쟁에서 완패했음을 보여준다.
지방의 쇠퇴는 최근 들어 더 극단적 상황으로 갔다. 농촌과 중소도시의 쇠퇴를 넘어 지방 대도시의 쇠퇴로까지 번지고 있다. 대도시는 이제껏 수도권 집중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는 ‘지방의 방파제’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부산을 시작으로 대구, 대전, 광주, 울산까지 모든 대도시에서 인구가 줄고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대도시 쇠퇴의 원인은 외적으로는 노무현 정부 이후 다시 수도권 집중이 가속됐기 때문이다. 2017년 지역내총생산(GRDP), 2019년 인구 통계에서 수도권의 비중이 모두 50%를 돌파했다. 대구, 광주, 울산은 수도권으로의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다. 대도시 내적으로는 정부가 신도심과 신도시를 무분별하게 건설해 원도심이 공동화하고, 인구가 주변 지역으로 흩어졌다. 부산과 대전이 이 문제를 겪고 있다.
대도시 쇠퇴의 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 2021년 10월18~22일, 11월23~25일 두 차례에 걸쳐 대전의 구도심과 신도심, 세종시를 찾아갔다. 대전시는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까지 정부의 집중 투자에 따라 건실하게 발전해온 대도시다. 그런 대전시가 어떻게 원도심 쇠퇴와 인구 유출의 양대 어려움에 빠졌는지 살펴봤다. 원인은 정부의 정책 실패에 있었다. ‘균형 발전’의 실패와 ‘신도시 개발’의 실패였다.
중소도시 위기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건 2010년 초부터다. 불과 10년여 지난 지금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울산 등 5대 광역시마저 인구 소멸을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방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바로 ‘공간 분포를 바꾸는 산업구조 변화의 힘’이다.
도시국가 싱가포르와 홍콩
2010년 초반부터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첨단업종이 수도권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10년 초반부터 수도권의 지역내총생산(GRDP) 비중이 다시 빠르게 높아졌다. 2017년 50%를 넘어선 이후 4년이 채 지나지 않아 53%에 육박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급성장한 첨단업종들은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협업하는 도시적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새롭게 성장하는 산업을 담을 공간적 그릇이 수도권밖에 없다. 수도권은 혁신 성장산업을 키워내는 초광역 메가시티로 변했다. 그래서 수도권에 젊은 인재가 몰리고 그런 인재를 쫓아 혁신성장 기업들이 이동하고 있다.
산업구조 변화가 부르는 공간 격차 심화는 우리가 원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변화는 현재도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구조가 대도시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하는 걸 인정한다면, 이제 지방이 해야 할 일은 명백해진다. 지방에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혁신기업을 위한 ‘공간적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지방에선 메가시티 논의가 한창이다. 행정구역을 뛰어넘는 협력사업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메가시티’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메가시티는 ‘인구가 매우 많은 도시’를 의미한다. 가장 흔한 기준으로 인구 1천만 명 이상의 도시를 말한다. 하지만 인구가 전부는 아니다. 행정구역을 합친다고 더 많은 인구의 광역권을 만든다고 저절로 경쟁력이 생기는 건 아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싱가포르와 홍콩을 보자. 이들의 인구는 각각 570만 명, 750만 명 수준이다. 도시국가 성격이 강한 이 두 곳은 높은 밀도, 다양성, 연계(네트워크)의 삼박자를 고루 갖췄다. 그래서 인구가 1천만 명 이상인 로스앤젤레스, 뉴욕, 도쿄, 상하이 등의 메가시티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싱가포르·홍콩 같은 강력한 도시국가를 구축할 수 있는 곳이 네 곳 정도 있다. 부산·울산, 대전, 대구, 광주 등을 중심으로 인구 500만~800만 명 수준의 초광역권이 그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지방의 상황은 홍콩이나 싱가포르와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한 케이(K)-메가시티를 구축해야 한다.
먼저 산업생태계를 구축해야
그럼 K-메가시티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야 할까. 메가시티를 조성하는 필수 단계에는 ‘광역적 협력의 틀’을 짜는 것, ‘에너지를 모을 거점을 설정’하는 것, ‘거점과 주변 지역의 상생 전략을 구축’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앞서 강조했듯, 이 모든 과정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공간적 그릇인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먼저, 광역 지자체 간 연계와 협력을 위한 사전작업이 필요하다. 광역행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거대 생활권을 잇는 광역교통망도 깔아야 한다. 또한 집적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역 내 공간의 위계를 설정해야 한다. 공간의 위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에너지를 모을 공간과 그렇지 않을 곳을 선별하는 작업이다. 그래야 일자리 유치를 위한 산업 전략이나 행정 서비스 인프라를 위한 계획을 효율적으로 짤 수 있다.
KTX 역세권 같은 광역교통의 결절점을 거점으로 잡고, 서울 강남 같은 압축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청년들이 선호하는 곳은 일자리뿐만 아니라 주거, 상업, 문화, 교육 기능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재미있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 플랫폼’의 구축은 광역적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둘째로, 메가시티의 거점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혁신 앵커기업(선도형 기업)들을 유치해야 한다. 물론 지역경제의 성격에 맞는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인세, 소득세 등을 인하하거나 투자 보조금으로 기업을 유인하는 시대는 지났다. 첨단기업들은 세금을 더 내더라도 수도권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지방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대거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혁신기업들은 이전한 지역에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혁신적 아이디어가 기업의 존망을 결정하는 시대에는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 셋째도 사람이다. 기업을 유치하려면 기업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원책도 함께 묶은 패키지를 구상해야 한다. 여기에는 노동자를 위한 공동주택 특별공급, 사택, 평생교육 등 다양한 지원책이 포함될 수 있다.
셋째로, 거점과 주변 지역의 상생 전략이 필요하다. 거점이 없다면 집적의 이익도 없고, 집적의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지역은 발전할 수 없다. 하지만 거점의 성장은 주변 지역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주변의 인구와 산업을 흡입하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거점은 주변 지역을 황폐화하며 독주하기도 한다. 이것이 거점과 주변 지역을 하나의 지역으로 묶어서 계획해야 하는 이유다.
주변과 이익을 나누는 도덕적 의무
거점은 주변 지역과 연대 의식을 가져야 하고, 주변 지역과 이익을 나눠야 하는 도덕적 의무도 있다. 다행히 우리에겐 양자의 상생을 꾀하는 여러 제도적 장치가 있다. 개발 이익이 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을 묶는 결합 개발 방식, 지역 상생 기금을 운영하는 방식, 공동세를 통해 지역 간 세금을 공유하는 방식 등이다.
수도권이 슈퍼 메가시티로 진화하며 더욱 강대해지는 과정에서, 지방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산업구조 변화의 거대한 흐름을 타고 최소한 수도권과 겨뤄볼 수 있는 대도시권을 만드는 것, 이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지방 광역시가 손에 쥔 유일한 카드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됐습니다.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