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게 있다
“나 혼자, 나 홀로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잘되고 혼자서 성공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분위기와 그런 주인공들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남을 도울 수 있고 함께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정말 우리는 다 죽어가고‘만’ 있는가?
내가 가르치는 학교는 웹툰이나 연극을 창작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곳이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며 학생들은 자신이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지 기획서를 내는데, 이 과제를 수행하며 한 학생이 자신이 구상한 스토리에 대해 한 말이다. ‘홀로’ 성공하는 이야기는 넘쳐난다며 이제 손익계산하지 않고 남을 돕더라도 길게 보면 손해 보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한 학생은 “타인에 대해 친절하기 힘든 세상에서 친절함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는지” 이야기하고 싶다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기획서를 가지고 왔다. 지금 세상은 좀처럼 남에게 친절할 수 없고 친절하다가는 손해를 보는데 정말 그렇기만 한가. 주인공이 세상을 여행하며 이 질문을 탐색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두 학생뿐만 아니다. 학생들과 동시대에 어떤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을 나누다보면 의외로 많은 학생이 ‘현실이 지옥’이라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지옥 같은 현실을 회피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이지 않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해답을 찾고 있다.
물론 이들에게도 현실은 지옥이다. 드라마 <지옥>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근대가 약속한 것과 달리 ‘합리성’이 깨진 사회다. 누가 왜 고통받고 지옥에 가야 하는지 그 합리성은 사라졌다. 다만 통보만 있을 뿐이고 합리성은 기껏해야 그 뒤에 ‘합리화’하는 논리로만 등장한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사후적으로 벌 받아 마땅한 자로 만들어진다. 그게 진짜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말이다.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탈락이 바로 그렇다. 학교폭력 같은 부당하게 집단 괴롭힘을 당해도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어본다. 너에게도 문제가 있으니 그런 일을 당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잘 생각해보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래서 기어이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내야만 한다. 그게 ‘주’원인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나 자신이라고 고백해야 일이 종결된다.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지옥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죽어만 가는가?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보면 그런 것처럼 보인다. 영화평론가 조재휘씨가 페이스북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현실은 지옥이고 인간은 극악하다”는 이야기가 “고평가받는 기류”가 전반적으로 형성돼 있다. 시대는 구제 불능한 종말론적이고 인간에겐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죽은 세상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 좀비로 살아간다.
친절함,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의존하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다 죽어가고‘만’ 있는가? 그리고 죽은 것으로 이야기할 때만 이 동시대의 끔찍함을 자각할 수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이렇게 끔찍함을 강조하는 게 냉소만 퍼뜨리는 것 아닌가? 종말론을 냉소적으로 소비하는 자신은 자각했다는 이유로 윤리적 책임을 면제하면서 말이다.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종말론적 상황을 정말 구제 불가능한 종말로 만드는 것 아닌가?
“다 맞는데 전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들은 여전히 이 지옥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평범한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 식으로 보면 여기서 아직 사는 “나는 뭐냐?”고 되묻는다. 지옥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삶이 지속된다는 건 거기 죽음 말고 우리를 계속 살게 하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아니라 삶을 이어가게 하는 무엇인가 말이다.
그런데 왜 친절함일까? 사람들은 한결같이 세상이 너무 무례해졌다고 이야기한다. 행동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서로에 대해 가장 악랄한 방식으로 조롱하고 험담하는 ‘나쁜 혀’가 됐다. 서로의 존엄을 짓밟는 방식으로 무례해진 ‘나쁜 혀’다. 다른 게 지옥이 아니라 이게 지옥이며 이것이 가장 큰 죄다. 존엄을 무례하게 짓밟는 것 말이다(유대교에선 이것을 살인과 같은 죄로 여긴다).
존재를 비참하게 나락으로 떨어뜨려 말살하는 이 무례함에 맞서는 것으로서 친절함은 서로의 존엄을 대하고 돌보고 돕는 태도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이야기하는 친절함은 ‘매너’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친절함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분명하게 대답한다. ‘기사도 정신’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시혜적 친절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오히려 이들은 그런 친절함을 의심하고 거부한다. 그런 친절함은 친절을 베푸는 사람의 ‘선의’에 지나치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언제든지 베푸는 자가 그 ‘호의’를 거둬들이면 한순간에 모멸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서로의 존엄을 돌보는 것이기에 친절함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평등에 기초해 서로 돌보는 것으로서 상호적이어야 한다. 한쪽이 한쪽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의존한다. 이것을 많은 말이 있는데 하필이면 ‘친절함’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상호성’이 즉각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너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너도 바로 나에게 친절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외적 미담 아니라 사회를 구축하는 보편적 원리
무엇보다 이런 친절함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즉각적인 게 아니라 긴 호흡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내가 학생들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란 부분이 이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좀더 길게 보고 넓게 보는 것, 그리고 그렇게 확장하는 것. 그것이 사회를 가능케 하는 친절함이기 때문이다.
만일 ‘친절함’과 ‘도움’을 즉각 돌려줘야 한다면 그것은 교환에 가깝다. 똑같은 가격으로 즉각 돌려줘야 한다면 교환 중에서도 매매에 가까운 거래가 된다. 상호성이 이런 교환이나 매매라면 굳이 거기에 친절함, 도움이란 말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이렇게 즉각적인 등가교환인 거래와 매매가 된 관계에 대해 “질렸다”고 말한다.
대신 이들이 친절함 혹은 도움이라고 부르는 상호성은 즉각 돌려주는 게 아니라 천천히 돌려줘도 된다고 말하는 관계다. 굳이 바로 돌려받지 않아도 그게 ‘손해’라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굳이 나에게 돌려주지 않고 시간이 흐른 뒤 타인에게 돌려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이것은 프랑스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가 말하고 근대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증여와 선물의 관계가 아닌가? 이 증여와 선물이 순환하는 호혜성의 망으로서 사회 말이다.
무슨 ‘나이브’한 소리냐고 할 것이다. 현실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친절함이 아니라 냉정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친절함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친절함이 ‘현실’을 훨씬 더 견고하게 하고 안정적으로 더 잘 작동하게 한다. 대표적 예로 헌혈이 있다. 영국 사회학자 리처드 티트머스는 <선물 관계>에서 혈액을 사고팔아 공급하는 미국식 영리 추구 혈액 공급보다 자발적인 헌혈이 더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모든 게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다루고 싶어 하는 친절함은 지옥 같은 사회의 예외적인 미담이 아니라 사회를 구축하는 관계에 대한 보편적 원리를 말한다. 사실 미담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넘쳐난다. 한쪽에는 지옥 같은 사회와 악마 같은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한편에는 끊임없이 또 쏟아지는 미담이 서로 짝패를 이룬다. 미담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가망 없는 절망임을 확인하는 증거일 뿐이다.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서 친절함은 이 세대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인 ‘공정’과 매우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점에서 또한 놀랍고 흥미롭다. 공정은 교환과 매매로 이뤄진 세계의 규칙이다. 내가 너에게 준 만큼 너는 나에게 거의 즉각적으로 등가의 것을 돌려줘야 한다. 그래서 공정에는 즉각적이지 않아도 되고, 나에게 오지 않아도 되고, 같은 가격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는 친절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공정이 상호부조의 연결망으로서 사회를 만드는 원리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이 공정의 세계에선 대다수의 삶은 위태롭거나 외로울 수밖에 없다. 관계를 지속시키는 결속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되고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고 본질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잘못이 벌어질 때마다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공정은 합리성의 원리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점에서 보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후에 ‘합리화’하는 논리일 뿐이다. 최종적으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가 자기를 벌해야 하는 곳, 여기가 지옥이 아니면 어디가 지옥이겠는가?
나르시시즘적 비장미에 젖은 이들에게
지금 세상이 공정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그 공정이 세상을 망친다는 사람들도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은 지옥이고, 인간은 악마다. 이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체제에 길든 ‘좀비’로 이야기된다. 대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홀로 ‘선동당하지 않고’ 깨어 있는 존재인 것처럼 나르시시즘적 비장미에 젖어 있다. 이런 글쓰기가 식자층과 대중 모두를 통해 인터넷에서 횡행한다. 이들에 의해 세상에 대한 냉소와 절망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여기에는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이 철저히 봉쇄돼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일 수는 없다. 이야기의 전부일 리도 없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죽었거나 그냥 죽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말할 리 없으니 죽음이 전부가 아닌 이야기,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아마 그 사람은 레베카 솔닛의 책 제목처럼 ‘지옥 위에 건설된 천국’(A Paradise built in Hell)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일 것이다. 지옥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는 그 뒤에 시작된다고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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