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사거리-어느 동네보다 살기 좋은 서민 골목 [골목 내시경]

2021. 12. 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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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세월 따라 길이 새로 나고, 그 때문에 지역의 이름이 변하는 곳도 있다. 미아사거리, 아주 예전엔 삼거리로 부르던 곳이다.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도봉로와 도심 방면으로 빠지는 동소문로, 안암동 쪽 종암로가 삼거리를 이루다가 장위동 방향 골목길이던 월계로가 확장되면서 사거리로 바뀌었다. 때문에 서울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도 미아사거리역으로 이름이 변했다. 서울 동북쪽 부도심 중 번화하기로 이름났던 지역이라 백화점이 두군데나 있고 대형마트도 들어서 있다. 예전 이 지역 명소였던 대지극장은 복합상영관으로 바뀌고 간판도 달라졌다. 대지극장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세대는 더는 극장을 드나들지 않는다.

미아사거리 일대 골목은 비교적 변하지 않았다.


역 주변의 동네도 대부분 미아동이었으나 미아4동과 9동은 송중동, 미아5동과 8동은 송천동, 미아6동과 7동은 삼각산동으로 바뀌었다. 지하철역 주변은 송중동과 송천동이 가장 넓다. 삼각산동 대부분은 재개발이 완료돼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송중동 골목길은 미아삼거리 시절의 옛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변한 것은 그다지 없어 보이고 다만 골목 안 구멍가게들이 아이스크림 전문점으로 바뀌고 간판들이 새롭게 정비된 것뿐, 사람 사는 모습이나 그 골목을 드나드는 이들의 살림살이는 대부분 예전 그대로다. 종종 무인점포도 보이는 것이 이 동네 치안 사정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

동네 사정을 묻자 철물점 주인은 “여긴 동네 지형이 낮아 예전에는 비만 오면 집들이 잠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체류지 빗물펌프장이 생기면서 그나마 나아졌는데 그래도 종종 빗물이 넘친다”라고 말해주었다. “그것 빼고는 살기 좋다. 물가도 싸고 교통도 서울 어디나 갈 수 있게 뚫려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오래 산 토박이가 많다”라고 덧붙인다.

골목이 자연히 시장이 된 골목시장이 많다.


삼거리 시절 옛 모습 간직한 골목길

골목 안 풍경은 대부분 다세대주택이나 다가구주택이 주를 이루었다. 간혹 좁은 마당이나마 곁붙어 있는 단독주택도 보인다. 마당에 위태롭게 훌쩍 자란 감나무에서 감을 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집주인은 “올해 감을 늦게 딴다. 감이 반은 연시가 됐고 반은 단감마냥 딱딱하다. 맛도 잘 들었다. 다른 집들은 벌써 땄는데 게으름을 부리다 보니 늦었다. 감이 200개는 족히 된다. 한 20개는 까치밥으로 남겼다. 올 과일값이 비싼데 부자된 기분이다”라고 기분 좋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옆집 감나무엔 까치밥 하나 남겨두지 않고 온통 단풍 든 잎만 남았는데, 집주인 인심이 서로 대비돼 보였다. 새들도 인심 좋은 집 뜰을 찾아 고맙다며 지저귈 것 같다.

송중동엔 간판 없는 시장이 있다. 큰길 안쪽의 방천골목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집과 집이 가게를 열고 그 가게들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시장이 됐다. 파는 것도 별별 것이 다 있어 그 자리에서 회를 떠주는 수산물 가게도 네댓 곳 있고, 곰탕국물과 돼지고기, 쇠고기를 파는 정육점도 서넛 있다. 채소와 과일은 싱싱하고 푸짐했다. 노인은 고향인 구례 산골에서 가져왔다는 산초 열매와 호박 속을 좌판에 놓고 팔고 있다. 산초 열매는 서울에선 보기 드문 귀한 물건이라 자연 눈길이 갔다. 떡집 여럿도 오후 늦은 시간이라 떡을 떨이로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시장 입구엔 오래된 목욕장 굴뚝이 우뚝 서서 행인을 지켜보고 있다.

뒷골목 깊숙한 곳에도 생업 현장이 치열하다.


세월이 쌓인 골목길의 불편함은 무엇보다 주차문제다. 이 골목 또한 그 사정을 벗어나지 못한 듯 가게와 집 앞엔 주차금지를 써둔 물통을 늘어놓았다. 주변에 공영주차장이 있지만 골목은 주차된 차들이 각자 맡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골목 안 어느 집 담벼락엔 재개발 서명을 받는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 골목을 빠져나오자 부동산업소 창엔 재개발을 반대하는 구구절절한 호소문이 붙어 있다. 요지는 미아사거리 역세권 재개발 사업이란 실익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사업이란다. 대부분은 부동산 업체에서 재개발을 권하고 부추기는 형국인데 이곳은 뭔가 사연이 다른 듯하다.

역주변은 다세대주택과 다가구주택이, 산비탈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쇼핑전쟁 승자는 백화점 아닌 골목시장

길 건너 송천동 골목에서 노인 둘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겨울 담요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에게 동행자가 물었다. “재개발 들어갔나?”, “빠졌어. 재개발하면 여기서 밀려나 다른 데로 쫓겨날 판인데 뭐가 좋겠어”, “그래도 이 기회에 아파트라도 하나 얻어두면 좋지 않나?”, “어느 세월에 되겠나. 시작해도 10년인데 집 준다는 소식은 함흥차사겠지. 공짜로 준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이대로 살다가 갈란다.” 지지부진한 재개발을 기다리느니 마음 편히 살다 가겠다는 노인의 이야기가 마음에 닿았다. 이 동네 골목은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아도 살기 편해보였다. 미아사거리역 주변 골목길은 좁지도 가파르지도 않은 평지라 산허리에 들어선 아파트에 비해 드나들기도 편리했다.

골목 전체가 상권이 되어 활발한 모습이다.


이 일대에는 학교가 많아 교육환경도 빠지지 않는 편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등학교로는 신일고등학교가 있고 영훈고등학교와 성암국제무역고등학교, 창문여고가 역 주변에 지척이다. 영훈국제중학교는 나름 명문 학교다. 곳곳에 초등학교도 여럿 있어 학부모들에게 이 동네 입지는 꽤나 괜찮다는 평이다.

골목의 건재함을 알리는 것은 곳곳에 번성하고 있는 골목시장들이다. 앞서 말한 방천골목시장 외에도 골목에 간판 없이 이어진 골목시장이 이 지역의 활황을 보여준다. 송천동 아래쪽에 숭인시장과 숭인 식자재 시장이 활기차게 장을 열고 있고, 위로 송천동을 관통해 삼각산동으로 이어지는 긴 길가로 골목시장들이 없는 것 없이 장터를 만들고 있다. 전통과자 2봉지에 5000원, 경쟁이 붙은 순댓국밥집은 국밥 한그릇에 3500원, 특은 5000원을 받고 판다. 물건은 품질이 좋아보이고 값도 쌌다. 대봉 5개 5000원짜리는 알도 굵고 잘 익었다. 바로 곁에 대형마트를 두고도 사람들이 골목시장에서 장을 보는 이유는 명백하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판다. 2곳이나 있는 백화점도 한산해보였고, 오히려 백화점 옆 의류 할인매장이 손님들로 붐비는 모습이다. 주차장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차가 밀려드는 시내 한복판의 백화점 사정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보였다. 속사정이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잠깐 살핀 정황으로 이 동네 쇼핑전쟁의 승자는 골목시장이다. 다른 곳에서 흔히 보이는 전통시장 현대화 사업 같은 거창한 진흥책이 없어도 소비자는 자기 원하는 바와 시장의 사정을 잘 알고 현명한 소비를 했다. 그것이 현실이다.

미아사거리역 주변에는 대중목욕탕이 잘 남아 있다.


팬데믹에도 살아남은 식당·목욕탕

단계적 일상회복(위드 코로나)으로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또 식당이 있다. 오후 시간에도 고깃집에 손님 무리가 가득 차 있다. 중늙은이들이 담배를 피우러 식당 앞에 나왔다가 설전을 벌인다. “아무리 쟤네들이 미워도 일할 사람을 찍어야지. 대체 그 인간을 민다는 게 말이나 되냐?” 사내가 핏대를 올려도 동행자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약을 올린다. 아마도 대선판 이야기인 듯 술김에 감정이 실린 대화는 날이 섰다. 사내들은 이미 누구 편에 설 것인지 결정을 한 것 같고 대화는 실없는 말싸움으로 흐른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곳곳에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사거리나 삼거리나 교차로와 갈림길이 많다는 것은 교통이 편리하다는 말과 통한다. 하지만 하루종일 길이 막힌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예전과 달리 정릉 쪽으로 빠지는 터널이 생겨 길목의 숨통은 조금 트였지만, 이 지역의 교통은 상습 정체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 때문에 편리한 교통입지에도 불구하고 집값은 다른 곳에 비해 덜 오른 편이라고 했다. 이 골목에서만 40년째 부동산을 한다는 업자는 “아파트값에 비하면 약과지만 몇년 사이에 두 배 오른 곳도 있고 거의 세 배까지 올랐다.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 모두 올랐는데,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겠다. 역세권에 교육환경이 좋다고는 해도 이렇게 오를 정도인지 가끔 무서운 생각도 든다”라고 말했다. 서울의 집값에 대해 아직은 오른다는 쪽에 기대를 거는 편이 더 많은 것 같지만, 그 결말에 대한 두려움도 서서히 커지고 있다.

시장은 대부분 평지에 있어 노인들이 발걸음을 하기에도 편리하다.


송중동과 송천동 골목 곳곳엔 아직도 대중목욕탕이 번창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숨이 죽었을 법한데도 골목 곳곳에 대중목욕탕이 자주 눈에 띄고 온천기호 간판과 뱅글뱅글 도는 이발소 표시가 골목골목 자리를 잡고 있다. 아마도 서울 시내 어느 골목보다 이 동네의 대중목욕탕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오래된 집들이라 욕탕 설비가 덜 되어 그럴 수도 있고,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는 목욕객들이 많아서일 수도 있다. 팬데믹으로 문을 닫아야 했던 업종 중에 찜질방이 있는데, 이 골목 찜질방들은 용케 불황의 골짜기를 건너 살아남은 것 같다. 살아남는 것이 위대한 시대다.

미아사거리역 일대 골목은 어느 곳보다 서민이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인다. 집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풍요로운 시장, 어디든 가기 쉬운 교통편, 아직은 상대적으로 낮은 집값. 주민들은 열심히 자기 일을 만들며 살고 있는 모습이다. 골목 깊은 곳까지 가게문을 열고 부지런히 사는 모습은 스쳐 지나치면서도 감동받을 만하다. 열심히,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이 이기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아직도 변하지 않은 우리가 지나쳐온 시대의 정황을 미아사거리역 부근 골목길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낮은 울타리를 치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가족을 위해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던 이들. 내일의 우리 속에서 그 성공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아사거리역 골목길을 걸으면 서민들의 삶이 주는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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