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리어왕의 세 가지 교훈
# 지난 주말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연극 ‘리어왕’을 봤다. 올해 88세인 이순재 선생이 리어왕을 열연해 더욱 화제가 된 바로 그 연극이었다. 이제껏 국내외에서 무대에 오른 연극 ‘리어왕’을 몇 편 보았지만 이번처럼 셰익스피어 희곡 대사가 거의 그대로 낭독되는 것같이 원전에 충실한 무대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공연 시간이 인터미션을 빼고도 3시간이 훌쩍 넘는 대작이었다.
# 셰익스피어의 이른바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가운데 하나인 ‘리어왕’은 비극이기 이전에 한 편의 인생 교과서요, 리더십 교본이다. 고전적으로 보자면 선악과 배신이 주제이기도 하겠지만 좀 더 현대적으로, 아니 세속적으로 보자면 리어왕의 제1 교훈은 “섣불리 미리 나누지 말라!”는 것이리라. 사실 리어왕 비극의 단초는 무작정 미리 나눠 준 데 있었다. 부와 영토와 권력을 모두 가져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리어왕이 세 딸(고너릴, 리건, 코델리아)에게 나라를 ‘미리’ 나눠 준 후 본인은 편안한 노후를 즐기겠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계획과 판단을 했다지만, 정작 그것이 자신은 물론 자식을 모두 죽이고 나라마저 결딴나게 만드는 파탄의 씨앗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416년 전 셰익스피어 희곡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더구나 한 집안, 한 기업, 한 국가의 상속에 관한 일에 국한될 이야기도 아니다. 엊그제 국민의힘 선대위 출범식 무대를 보면서 연극 리어왕의 무대가 오버랩되었다고 말하면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윤석열 대선 후보가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과 김병준, 이준석 두 상임선대위원장에게 각각 빨간 목도리를 둘러줄 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정작 권력의 분깃을 나눠 주는 리어왕이 대선 후보 윤석열인지 킹메이커라고 하는 김종인인지가 다소 헷갈렸지만 말이다.
# 리어왕의 제2 교훈은 “듣기 좋은 말에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리어왕은 세 딸에게 자신의 왕국을 나눠 줄 터이니 각자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고백하듯 말해보라고 주문하지 않았나. 그 고백 강도에 따라 부와 영토를 더 나눠 주겠노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첫째 딸 고너릴은 “아버지를 우주보다, 목숨보다,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사랑한다”고 말했고, 둘째 딸 리건은 한술 더 떠서 “언니의 말에 부족한 부분을 느낀다”며 “세상 그 어떤 즐거움도 아버지를 향한 마음보다 즐거울 수 없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지만 진짜 말로 다해버린 셈이다. 하지만 셋째 딸 코델리아는 “아버지를 극진하게 사랑한다는 것이야 마땅히 딸로서 해야 할 도리인데 이를 어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저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리어왕은 기대했던 답이 돌아오지 않자 격노하며 “저 애는 오만함을 정직함이라고 부르나 본데 막내딸에게 주려던 권력과 재산은 앞의 두 딸에게 넘겨줄 테니 너는 오만함과 결혼하라”며 저주하고 힐난했다. 가식과 위장으로 넘쳐 난 첫째와 둘째 딸의 감언이설에 취해 나라를 송두리째 넘기고 정작 가장 사랑하던 딸에게 가장 극심한 주저를 퍼부은 리어왕은 불행과 불운을 자초하고 만다. 작금의 현실에서도 정권 교체를 바라는 사람이 100명 중 60명이라면 그중에서 20명 정도는 마치 셋째 딸 코델리아 같은 이들이리라. 코델리아가 왕에 대한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품고 있으면서도 노골적으로 표하지 않는 것처럼 정권 교체에 대한 바람은 간절하지만 정작 그것을 보수 후보를 향해 표시하지 않는 이가 얼추 20%다. 이들을 끌어안아야 정권 교체도 가능해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 리어왕의 제3 교훈은 “막연히 호의를 기대하지 말고, 집행권과 왕관은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리어왕은 고너릴과 리건 두 딸이 마련해줄 기사 100명을 거느리고 매달 번갈아가며 두 딸의 성에 머무르기를 기대했다. 더구나 왕의 칭호와 보좌는 리어왕 자신이 갖고 있으되, 그 밖의 집행권은 두 딸에게 넘겨주고 그 증거로 자신의 왕관을 주어 번갈아 사용하도록까지 했다. 이에 리어왕을 보필해온 충신 켄트 백작이 그 뜻을 거두시라 했지만 리어왕은 “활시위는 이미 당겨졌다. 과녁을 피해 서시오!”라고 말할 뿐이었다. 켄트 백작이 물러서지 않고 “차라리 저를 쏘아주십시오” 하며 왕이 뜻을 거두길 충심으로 건의하자 리어왕은 끝내 켄트를 추방하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 리어왕에게 돌아온 현실은 두 딸의 박절한 응대와 광야로 내몰리는 일 아니었는가.
# 사실 이번 대선은 정말이지 희한한 선거다. 여당과 제1 야당의 대선 후보에 대한 비호감도가 역대 가장 높은 선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여론조사에서 정권 교체를 바라는 국민 여망이 훨씬 크다. 그래서 그럴까. 아직 밥은커녕 불도 붙이지 않은 생쌀 담은 솥에 이 사람, 저 사람 꽂은 숟가락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권력은 나눠야 커진다는 말도 있지만 크든 작든 권력을 나눈다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아직 잡히지도 않은 권력을 입도선매하는 일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정권 교체를 바라는 국민 여망은 오직 하나! 일단 정권을 되찾아만 오라는 것이다. 그 후의 문제는 다시 그때 가서 보자는 절박하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정권 교체를 바라는 대다수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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