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티의 유럽 통신] 英·EU '이혼' 1년.. 식품·휘발유 가격 오르고 금융사들 탈출 러시
순탄치 않았던 47년 간의 결혼 생활 뒤, 영국과 유럽연합(EU)은 2020년 1월 31일 ‘이혼’에 합의했다. 작년 남은 기간 무역·여행·이동의 자유에 변동이 없는 과도기를 지났고, 이제 진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가 시작된지 1년이 되어 간다. 해협 양편의 영국과 대륙 유럽 모두 브렉시트 논쟁이 불러온 피로감에 지친 분위기다.
런던에 사는 독일인 친구는 “사람들이 브렉시트 말잔치에 진저리가 난 것 같다”고 했다. “이제는 그만 자기 삶을 이어가고 싶어해요. 브렉시트에 반대한 사람들은 찬성파가 영국을 혼란에 빠뜨렸다며,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은 영국과 유럽의 이혼이 거칠게 진행됐다며 편치 않은 감정을 갖고 있어요. 양쪽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거죠.”
런던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일하는 스페인 국적의 마리나 곤살레스 바스케스(23)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특히 런던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브렉시트 투표가 실제로 진행되고 또 현실화했던 과정을 여전히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런던과 그 외 지역의 영국인들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모든 영국인들이 브렉시트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격변(disrupting)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해야겠죠.” 곤살레스는 “국민투표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잘못된 정보가 뿌려지고 있었다는 것, 그 때의 공약은 결과적으로 깨졌다는 것, 매일의 일상에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을 뿐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고도 했다.
사실, 브렉시트가 영국의 미래에 좋은 쪽으로 작용할지 여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이런 저런 말들에도, 단기적 영향이 부정적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느 정도가 브렉시트 때문이고 어느 정도가 코로나 사태 영향인지 계량화는 어렵지만. 그리고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몇 안 되는 포인트 중 하나인 것 같다.
인디펜던트지가 서식스대에 의뢰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존슨 총리가 추진 중이거나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영국이 챙길 경제적 이익은 “EU를 떠나며 생겨난 국내총생산(GDP) 손실분을 메우는 데에도 턱 없이 모자라는 수준”이다. 그 이익은 향후 15년간 1인당 7파운드(약 9.3달러) 정도로, 연 GDP의 0.01~0.02%, 국민 1인당 연간 50펜스(70센트 미만)에 못 미친다. 같은 기간 EU 탈퇴로 GDP의 4% 정도가 감소하는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영국 정부 추산치에 비하면 미미하다. 이런 비관적 전망은 영국 정부 예산 기관이 지난 10월말 “브렉시트의 장기적 영향이 코로나보다 2배 이상 클 것”으로 추정한 보고서를 발표하며 확인됐다. 보고서는 브렉시트로 영국의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1인당 GDP가 4%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코로나 사태는 GDP의 2% 감소를 불러올 것으로 추산됐다.
브렉시트로 고통받는 것은 무역 뿐이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런던이 앞으로도 오랜 기간 세계의 금융 허브로 기능할 것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금융산업 역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예측한다.
불길한 징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싱크탱크 뉴파이낸셜의 올해 4월 보고서에 따르면,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은행·금융기관 440여 곳이 영국을 떠나 다른 EU 국가로 이전했으며, 영국에 있던 은행 자산의 약 10%(9000억 파운드 또는 약 1조2000억 달러)가 이들을 따라 EU 국가로 이전했거나 이전하는 중이다. 일자리도 비슷한 추세다. 금융 서비스 일자리 약 7400개가 이미 EU 국가로 넘어갔다. 영국 금융권 취업자가 100만명에 달하는 걸 생각하면 적은 숫자지만, 앞으로 새로운 일자리는 영국보다 다른 EU국가에서 생겨날 것이라는 우려가 더 크다.
일자리 감소는 EU 관련 분야에서도 발생한다. 모든 EU 기관이 EU 국가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2019년 유럽의약품청과 유럽은행관리국이 본부를 런던에서 암스테르담과 파리로 각각 옮기면서 또 수천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무역 관련 문제는 가장 눈에 띄고 국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 영국 항구의 화물 적체현상과 숙련된 근로자 부족으로 수퍼마켓의 물품이 부족해지고 주유소에서는 긴 줄을 서야 하는 혼란이 이어졌다.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영국 국적자 런던 시민 라시타 릴라세나(52)는 “지금껏 일어난 일은 재앙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식량, 휘발유, 건설 근로자, 식당이나 바의 서비스 인력 부족으로 제 때 원하는 상품을 받는 일이 심각하게 지연되고 있어요. 브렉시트를 주장한 사람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약속은 단 한 가지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상황은 너무 실망스러워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브렉시트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버킹엄셔 밀턴 케인스에 사는 배관공 조시 웨이우드(34)는 “나는 EU 탈퇴에 투표했고, 다시 기회가 와도 그렇게 할 것”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저런 단기적이며 작은 불편은 우리가 EU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숙련 근로자 부족 현상은 육가공 산업과 화물차 운송을 포함한 다른 산업 부문에도 타격을 줬다. 영국정육가공협회(BMPA)에 따르면, 몇몇 대형 업체들은 인력 부족 때문에 쇠고기를 아일랜드로 보내 가공한 뒤 다시 영국으로 들여오고 있다. 닉 앨런 BMPA 회장은 “최소한 1만명의 숙련된 육류 가공 인력이 부족하다. 일부 돼지고기 생산업자들은 네덜란드로 돼지를 보내 가공한 뒤 재수입하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했다.
한편 이탈리아 교통부 고위 공무원인 안드레아 데 체사레(54)는 “식료품과 휘발유 등 생필품 부족 현상이 브렉시트로 인해 극명히 드러나긴 했지만, 보다 근본적 문제는 유럽 연합 전체적으로 화물 트럭 운전기사가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 체사레에 따르면, EU트럭 운전면허는 취득 비용이 비싼데다 취득 기간도 최대 2년이 걸린다. 해결책은 EU가 아닌 나라들 사이에서도 상품을 운송할 수 있는 쌍방 허가증을 발급하거나, ECMT(유럽 교통장관 회의) 회원국들 안에서 대부분의 상품을 운송할 수 있도록 여러 나라에서 통용되는 면허증을 발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EU 소속 국가 뿐 아니라 몇몇 동유럽 및 남동유럽 국가들도 포함되게 된다. 데 체사레는 “영국은 이 제도를 활용해왔지만, 브렉시트가 실현된 지금은 다른 유럽국가 운전 기사들이 영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면서 영국내 화물 운전기사 부족 현상과 맞물려 문제를 심화시키는 것”이라며 “영국은 다른 유럽국가 운전 기사들의 영국 내 통행 문제를 놓고 EU와 협의하는 것은 물론, 자국내에서도 운전 기사를 증원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브렉시트로 고통 받는 것은 영국 국민과 기업만이 아니다. 통신사 EMEA 부사장 톰 파커(48)는 “문제는 해협 양안에서 감지된다”고 했다. 벨기에 브뤼셀의 영국상공회의소 회장으로 가족과 함께 브뤼셀에 살고 있는 파커는 “갈수록 영국인들이 유럽으로 이주하는 것을 꺼리는데다 취업비자 발급 서류작업과 절차가 더 복잡해지면서 영국인을 고용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영국 국적의 직원을 고용했을 많은 기업들이 이제 더 많은 현지인을 고용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영국과 벨기에 이중국적이 있어 문제가 없지만, 다시 영국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 귀찮은 문제를 겪는 사람도 많아요. 브렉시트는 단순히 불편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력 부족을 겪는 영국 항구에서 사람과 화물이 밀리지 않도록 하려다 세관 검사가 불철저해질 가능성도 충분하죠. 그러면 밀수품이 증가하고,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파커는 브렉시트 전에 브뤼셀에서 런던의 집까지 세 시간이면 갈 수 있었지만, 국경 검문이 엄격해지면서 이제 그렇게 빠른 이동은 불가능하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런던 출장을 다녔던 파리의 변호사 발레리 샤포(45)도 마찬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출입국 절차가 힘들어져서 런던에서 보내는 주말의 즐거움을 잃게 됐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코로나 사태로 원격 근무가 늘면서 출장이 줄어든 게 불행 중 다행이랄까요. 이제는 가능하면 대면 회의를 하러 영국행 기차를 타는 일은 되도록 피하려고 합니다.”
영국의 정책이 점점 명확해지고 출입국을 위해 늘어선 긴 줄도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브렉시트 이전 시대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곤살레스 바스케스는 “공항에서 합법적인 입국 자격을 갖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수시간씩 기다려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고 했다.
브렉시트는 영국 학계와 연구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 EU로부터 받던 연구 자금은 잃을 가능성이 높고, EU국가에서 오던 유학생은 줄어들며, EU 국적의 연구원을 채용하는 것은 더 어려워지고, 영국 학생들이 EU 국가에서 공부하는 것 역시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현재 EU가 자금을 지원하는 연구에 대해서 자금 지원을 보증하고 있다.
영국 국적의 남편과 함께 런던에서 살고 있는 인도 출신의 홍보 컨설턴트 네하 쿠마르(43)는 브렉시트로 인한 이런 저런 불행들 중에서도, 자신의 자녀들이 영국 사회에서 기회를 얻기 어려워질까봐 분노하고 또 근심하고 있다. “나쁜 뉴스들만 들려오고, 브렉시트의 파장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식료품과 휘발유 가격 상승부터 세금 인상까지 우리 같은 중산층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어요. 가장 심각한 것은 영국 국적인 우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데도 유럽 교육에 접근할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는 점입니다.”
곤살레스 바스케스도 “브렉시트와 코로나 때문에 영국 내 모든 대학에서 유학생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우려했다. “영국에 유학하려는 EU 학생은 더 줄어들 게 될 겁니다. 앞으로는 다른 외국 유학생들과 같은 조건을 적용받게 돼 학비가 2배 이상 비싸지고, 학자금 대출 길도 막히게 되니까요.”
브렉시트가 후회스러운 사람들에게 조금 희망적인 소식도 있다. 최근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많은 응답자들이 심경의 변화를 보였다. 영국의 인터넷 기반 시장조사·데이터 분석기관 유고브(YouGov)에 따르면,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가 옳은 결정이었느냐는 질문에 찬성한 응답자가 2016년 8월 46%에서 올해 11월 40%로 줄었고, 반대한다는 응답자는 42%에서 48%로 늘어났다. 브렉시트가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첫 기간이었던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브렉시트가 잘 이뤄지고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대다수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지난달 12일 영국 성인을 대상으로 EU 재가입 혹은 탈퇴 상태 유지를 물어본 런던의 시장조사 컨설팅업체 사반타 컴레스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3%가 EU에 재가입하고 싶다고 답했다. 올해 6월 조사보다 4%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더 흥미로운 것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 ‘탈퇴’에 찬성한 사람 10명 중 1명은 ‘EU 재가입’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영국이 단기적으로 EU에 재가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장기적인 전망은 좀 더 장밋빛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영국이 EU에 완전히 재가입하지 않더라도, 자국 국민과 기업, 경제를 위해 EU와 모종의 타협을 하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브뤼셀 영국상공회의소 파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과 유럽은, 우리 사이의 차이점보다 우리가 가진 공통점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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