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김장김치, 인생의 맛
집집마다 김장이 한창이다. 과일과 채소, 건어물 보관 창고로 체면을 구겼던 김치냉장고가 드디어 제구실을 할 때다. 오이소박이, 나박김치, 동치미, 깍두기, 갓김치, 섞박지가 아무리 특유의 풍미를 자랑한대도, 이 겨울 김치의 제왕은 역시 김장김치다. 아삭한 햇김치부터 김치찌개, 지짐이, 만두소, 볶음김치, 묵은지까지. 앞으로 펼쳐질 김치의 무궁무진한 변신과 활용을 상상하다 보면, 김장하는 손길에 절로 힘이 갈 지니.
여말선초의 문인 권근(1352~1409)은 ‘축채(蓄菜)’에서 김치(채·菜)를 쌓아놓은(축·蓄) 김장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월이라 바람 거세고 새벽 서리 매서워, 울안의 채소 모두 다 거둬들였네. 맛나게 김치 담가 겨울을 대비하니, 진수성찬 아니라도 입맛 절로 나는구나. 아무래도 겨우살이 쓸쓸하기 짝이 없고, 남은 해 생각하니 감회 더욱 깊어지네. 앞으로 얼마나 더 먹고 마실 수 있으랴, 한 백 년 세월은 유수처럼 바쁜 것을.’
김장은 연례행사, 삼삼오오 모여든 여인들의 수다와 정겨움이 더해지는 시끌벅적한 축채의 축제다. 절인 배추에 마늘, 생강, 고춧가루 기본양념을 넣고, 미나리, 부추, 갓 등 향신 채소를 첨가하여, 새우젓, 조기젓, 굴젓으로 풍미를 더해 잘 버무리면 완성. 켜켜이 쌓아올린 한 무더기에 마음이 막 든든해지는 찰나, 문득 깨닫는다. ‘아, 올해도 다 갔구나.’ ‘이렇게 또 한 살 먹는구나.’ 봄의 싱그러움과 한여름의 풍요, 가을의 낭만을 지나 김장철에 이른 초겨울이 초로의 자신 같다고 느낀 걸까? 하지만 감상은 거기까지, 다시 마음을 추슬러본다.
‘인생에 입에 맞는 그것이 진미지, 채소를 씹다 보면 고기 못지않다네. 내 집 동산에 몇 이랑 터가 있어, 해마다 넉넉하게 채소를 심는다네.’ 조선시대 서거정(1420~1488)은 ‘채마밭을 거닐며(순채포유작·巡菜圃有作)’를 지어 노래한다. 인생이란 내 입맛에 맞는 채소로도 충분하다고. 그러면서 동산 빈터에 부지런히 채소를 심겠단다. 넉넉한 마음으로 내년 김장을 준비하며.
김장김치의 깊고 오묘한 맛의 비결, 그것은 이런 세월의 감회와 철학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오랜 기간 숙성되고 곰삭은 인생의 맛 말이다. 하여 정의하노니, 김장김치는 철학이다. 인생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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