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노론을 떨게한 정조의 한마디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
* 유튜브 https://youtu.be/JRL4Lvz1SsY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가위를 7일 앞둔 1793년 8월 8일 왕위에 오른 지 17년이 된 노련한 국왕 정조가 문서 한 장을 꺼내 읽는다. 듣는 사람은 전·현직 대신과 기타 문무 관료들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오동나무여 오동나무여, 그 누가 충신인고. 내 죽은 자식 그리워 잊지 않노라.”
필자는 선왕인 영조였고, 아들을 죽인 사실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1776년 3월 자기가 왕위에 오르고 두 달 뒤 이미 이 문서를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도세자 죽음을 방조, 묵인, 사주했던 노론세력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으리라. 사사건건 국책 사업에 시비를 걸던 노론은 입을 꿰매고 정조에게 무릎을 꿇었다.
오랜 세월 비장한 이 문서를 ‘금등지서(金縢之書)’라고 한다. 금등지서는 쇠줄로 단단히 봉한 상자에 넣은 비밀문서를 뜻한다. 정조는 등극과 함께 확보한 이 문서를, 가장 필요한 때까지 숨겨뒀다가 공개한 것이다. 다섯 달이 지난 1794년 1월 25일 정조의 야심찬 신도시 화성 행궁 터 닦이 작업이 시작됐다. 화성으로 이장한 아비 사도세자 옆에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금등지서에서 화성 신도시까지 숨 막히게 벌어졌던 왕실 권력 투쟁 이야기.
283. 금등지서의 비밀과 융건릉
“세손은 정치 알 필요 없음”
1764년 2월 20일 영조는 자기가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사도세자 아들 이산(李祘·‘이성’으로도 읽을 수 있다)을 세손에 책봉했다. 그날 그가 손자에게 이리 물었다.
“혹 사도세자 일을 말하는 자가 있다면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세손이 답했다. “그른 일이옵니다.” 왕이 거듭 물었다. “그렇다면 군자냐 소인이냐?” 손자가 답했다. “소인입니다.” 영조는 이 대화를 실록에 기록하라고 지시했다.(1764년 2월 20일 ‘영조실록’)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불상사인 사도세자 죽음을 재론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이었고, 세손은 명에 순종했다.
11년 뒤인 1775년 영조는 노쇠함을 견디지 못하고 세손 이산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했다. 노론 세력은 “세손은 노론, 소론도 알 필요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으며 조사(朝事)도 알 필요 없다”고 일축했다.(1775년 11월 20일 ‘영조실록’) 당정도 국정도, 조정 일도 알 필요 없고 모든 정치는 자기들이 다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른바 ‘삼불필지지설(三不必知之說)’이다. 열흘 뒤 영조가 “팔십 노인이 기력이 쇠했다”며 다시 대리청정 뜻을 밝혔다.
아니 될 일이었다. 아비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죽이게 만든 세력이 바로 이 노론이 아닌가. 아무리 ‘재론 불가’ 서약을 했어도, 그 아들이 세손이 되었고, 영조가 죽기 전 그 세손이 권력을 접수하게 되면 노론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친 피바람이 몰아닥칠 판이었다.
삼불필지를 주장했던 좌의정 홍인한은 아예 왕명을 적어내리는 승지 앞을 가로막고 왕명을 듣지도 글을 쓰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같은 해 11월 30일 ‘영조실록’)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비를 목격했던 세손, 미래에 왕위를 이어받을 세손은 왕 앞을 가로막는 노론 대신들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듬해 영조가 죽고 경희궁에서 정조가 즉위했다. 의례적인 교문을 반포하고 대사면령을 내린 정조는 빈전 앞뜰에서 대신들을 접견하며 이렇게 일성을 던졌다.
“아(嗚呼·오호),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1776년 3월 10일 ‘정조실록’) 망나니 칼 수십 개가 한꺼번에 노론 대신들 귀에 박혔다. 넋이 반쯤 나간 채 와들와들 떨어대는 대신들에게 정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령한 무리들이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 유언에 따라 형률로 논죄하겠다.” 사도세자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의문에 더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으니, 노론에게는 대사면령보다 더 기쁜 복음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된 4월 7일 정조는 자기 대리청정을 극렬 반대했던 노론 홍인한을 여산으로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먹여 죽여버렸다.(같은 해 4월 7일, 7월 5일 ‘정조실록’) 노론 넋을 끄집어냈다가 집어넣었다가 또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국왕 앞에서 노론은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도세자 묘 이장과 현륭원
이미 등극과 함께 노론을 휘어잡은 정조는 이어 아버지 사도세자 묘 이장을 시도했다.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기 전 사도세자 묘는 양주 배봉산에 있었다. 묘는 수은묘(垂恩墓)라 불렸다. 즉위 한 달 전 정조는 수은묘에 참배를 하고 ‘목이 메여 좌우를 감동시킬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1776년 2월 5일 ‘영조실록’) 즉위 9일 후 정조는 그때까지 관리자가 없던 수은묘에 수봉관을 두고 다음날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다. 존호 또한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바꿨다.(1776년 3월 19일, 3월 20일 ‘정조실록’)
그런데 수은묘는 풍수상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봉분 뗏장이 말라죽고 청룡혈이 휑하니 뚫려 있는가 하면 정자각 기와에는 뱀이 살았다. 정조는 곧바로 이장을 하려 했지만 노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실록에는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후 자그마치 13년 세월이 흘러 금성위 박명원이 상소를 했다. 박명원은 사도세자 누나 화평옹주의 남편이니 정조에게는 고모부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영우원 안부를 걱정하느라 깊은 궁중에서 눈물을 뿌리신 것이 얼마인지 모르며, 봄비와 가을 서리에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다는 것을 여러 번 들었나이다. 천장을 결정하시라.”정조가 말했다. “내가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하기만 한 문제였다.”(1789년 7월 11일 ‘정조실록’)
13년을 기다린 상소였다. 마침내 아버지 묘를 옮길 수 있게 된다는 생각에 정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원래 가슴이 잘 막히는데, 지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잠시 쉬도록 하자.”
잠시 뒤 정조 입에서 너무나도 전문적인 풍수 이론과 배봉산 불가론 논리가 술술 튀어나왔다. 정조는 고려 때 풍수가 도선의 말까지 인용하며 “나의 뜻은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수원으로 결정하였다”라고 선언했다. (1789년 7월 11일 ‘정조실록’)
그해 사도세자 묘를 이장하게 된 이론적 배경과 화성 입지에 대해 정조가 쓴 ‘천원사실(遷園事實)’은 한자로 2만자가 넘었다. 게다가 정조는 “올해가 모든 운이 길한 해라 즉위 때부터 이날만을 기다려왔다”고 했다. 길년(吉年)을 잡아두고 자그마치 13년 동안 묘 이장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다. 자기 고모부가 상소를 올리기 전 이미 긴밀한 사전 협조를 거쳤음을 뜻하는 글이기도 했다.
그리되었다. 찌는 여름날 창경궁 문정전 앞뜰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아비 사도세자가 형편없는 묫자리를 떠나 보무도 당당하게 왕릉에 버금가는 유택(幽宅)으로 천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천장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석 달 뒤인 10월 4일 사도세자 유해를 담은 영가(靈駕)가 배봉산을 출발했다. 10월 16일 천장이 완료됐다. 정조는 새 묫자리 이름은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했다. 현륭원은 1899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융릉(隆陵)으로 격상되고 사도세자 또한 황제로 추존됐다.(1899년 9월 1일, 12월 7일 ‘고종실록’)
화성 신도시 건설과 금등지서
정조는 천장 결정과 함께 이렇게 선언했다. “고을을 옮길 계획을 세우라. 백성을 옮길 일은 이미 계획돼 있느니라.”
노론이 득실거리는 한성을 떠나 권력을 과시할 신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천장 결정 나흘 뒤 새로운 능묘 주변인 수원도호부 백성이 10리 북쪽 팔달산 아래로 이주됐다. 그리고 능묘 주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니, 그 도시가 화성이다.
신도시 건설 디자인은 규장각 초계문신 정약용이 맡았다. 1793년 1월 12일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켰다. 그날 판중추부사 채제공을 수원 유수로 전격 임명했다. 그해 4월 정약용이 행궁 건설계획서를 제출했다. 정조는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1793년 5월 25일 ‘정조실록’)
사흘 뒤 영의정 채제공이 상소문을 올렸다. “극악무도한 자들의 지친과 인척들이 벼슬아치 장부를 꽉 메우고 있다. 사도세자를 추숭하고 저들을 처벌하시라.”
정약용도 채제공도, 화성을 길지라고 주장한 윤선도도, 수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유형원도 모두 남인이었다.(1793년 12월 8일 ‘정조실록’) 그 남인의 수장 채제공이 ‘조정에 가득한 극악무도한 자들을 처단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피 냄새가 조정에 넘실거렸다. 노론인 좌의정 김종수는 “채제공은 역적 앞잡이”라며 저항했다.(1793년 5월 28일, 5월 30일 ‘정조실록’)
추석 일주일 전, 끝없는 노론 저항 속에 정조가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말했다. “영조께서 당시 도승지 채제공을 휘령전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휘령전은 사도세자 혼전으로 쓰이던 창경궁 문정전을 가리킨다. “영조께서 친필 문서를 채제공에게 주며 위패 아래 방석 속에 감춰두라고 했다. 이게 그 문서다.”
그리고 정조가 보여준 글이 ‘피 묻은 적삼’이었다. “즉위 직후 채제공이 이 문서를 나에게 알려줬느니라. 상소는 이 문서에서 연유한 것이니 입 다물라. 오늘 이후 시끄럽게 굴면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다스릴 것이다.”
17년 동안 독기를 품고 간직했던 글이었다. 즉위 일성이었던 ‘사도세자의 아들’, 노론 대신 홍인한의 처형과 현륭원 천장, 남인 중용에 이어 노론에게 던진 마지막 경고였다. 이듬해 1월 13일 정조가 화성 현륭원에 행차했다. 향을 피우며 감정을 삭이듯 낮은 소리로 울다가 무덤가로 올라가서는 오열했다. 노론 입은 열리지 않았다. 화성 신도시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행궁은 일사천리로 준공됐다. 이상 사도세자 죽음에 맺힌 한이 신도시 개발로 이어진 ‘금등지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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