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분노'라는 정치적 자원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2021. 12.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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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촛불 시위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이제 서서히 끝나고 있다.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2022년 대선의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정권 재창출을 원하는 집권 여당과 정권 교체를 간절히 바라는 야당의 샅바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적 정권 교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유권자들의 지지이다.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정당이 승리하는 선거 제도에서 양당이 국민의 관심과 주목을 받기 위해 짜내는 전략과 쏟아붓는 노력이 처절해 보인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권력을 쟁취하려는 정당이나 빼앗기지 않으려는 정당 모두 상황이나 정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 우리는 권력을 획득하고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자원을 흔히 ‘정치적 자원’이라고 부른다. 정치 자금과 같은 경제적 힘, 사람들을 동원하고 조직할 수 있는 네트워킹의 힘, 국민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이념 및 정책과 같은 전통적 자원들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늘의 도움이 없으면 대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처럼 우연적인 요소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재난, 특정한 사건을 통해 결집하는 새로운 세대의 부상과 시대정신과 같은 외부의 우연적 요소도 중요한 정치적 자원이 된다.

그렇다면 다음 정부의 정치적 자원은 무엇일까? 정치적 자원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정권 획득의 커다란 수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거를 통해 획득한 권력으로 만들어갈 새로운 국가와 질서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를 만든 정치적 자원은 바로 촛불 시위였다.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타락에 항거하는 국민의 분노가 없었다면, 문재인 정부는 성립할 수 없었다. 촛불 시위로 표출된 정치적 분노에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다르지 않았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 진보와 보수의 해묵은 대결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합적 정치질서가 시작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분노의 촛불이 꺼진 뒤 남겨진 건
역설적으로 또 다른 ‘분노’다
분노가 가리킨 지점은 사회분
열통합의 목소리가 사라진 지금
선거 후 그것은 분열의 새 불씨다

국민 대다수는 ‘촛불 시위’가 진정한 의미에서 ‘촛불 혁명’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대선을 앞둔 지금 사회적 혁신과 통합의 촛불은 꺼져가고 있다. 촛불이 꺼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사회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두 진영으로 완전히 분열되었다는 사실이다. 진영 논리에 갇힌 사회에는 희망의 촛불을 태울 공기가 없다. 자기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내모는 당파의 싸움으로 사납게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 앞에 사회적 통합의 촛불은 너무나 미약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어느 진보 지식인처럼 촛불 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다음에도 2기 촛불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황할 뿐이다.

우파 정권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분노로 타오른 촛불이 꺼진 자리에 남겨진 것은 역설적으로 역시 ‘분노’이다. 좌파 정권의 실정과 부패에 대한 분노를 정치적 자원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국민의힘 대선 후보인 윤석열만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도 50%를 넘는 정권 교체 여론 속에 표현된 국민의 분노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려 한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에 이은 민주 정부 4기의 탄생을 추구하던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후보가 당선돼도 정권 교체’라고 말을 바꾼 것은 국민의 분노를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분노는 이처럼 여론의 힘과 방향을 감지할 수 있는 정치적 기압계이자 풍향계이다. 분노가 가리키는 방향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국민이 주목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토론과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국민의 주목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종하느냐이다. 독일의 건축가이자 경제학자인 게오르크 프랑크가 만들어낸 ‘주목의 경제’(Economy of Attention)라는 개념처럼 ‘주목’은 정치적으로 희소하고 유용한 자원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으며, 국민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은 없다. 자기를 표현하고 과시할 수 있는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주목과 관심은 가장 저항할 수 없는 마약이다. 오늘날 정치가 예능이 되어가는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정치나 예능이나 모두 국민의 주목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정치적 자원에서 가장 이익이 되는 자원은 분노이다. 정당과 정치인, 그리고 대선 후보는 국민의 분노를 이용해 주목을 받으려 한다. 분노는 국민 대다수가 어떤 문제와 사안에 관심이 있고 듣고 싶어하는지를 규정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가?’는 언제나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분노해야 하는가?’에 앞선다. 예컨대 정치가 기후변화와 환경파괴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시작한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대선 후보들이 기후변화라는 인류문명의 중대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분노해야 한다고 아무리 역설해도 메아리가 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분노가 가리키는 사회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주목 경제’가 주목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면, 분노에 기반한 ‘주목 정치’는 주목해야 할 문제에 관심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분노가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면, 우리는 분노의 방향과 내용을 정확하게 포착해야 한다. 그렇다면 분노로 탄생한 정권이 저물어가는 지금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분노는 어떤 것인가? 정치인들이 분노라는 정치적 자원을 이용하려고 하면서도 말하기를 꺼리는 분노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가진 분노는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생산적 자원이 될 수 있는가?

‘2기 촛불 정부’에 대한 희망 자체가 말해주는 것처럼 지금의 분노는 문재인 정부의 실패에 대한 분노다. 어느 정부나 실패할 수 있다. 국민이 정책의 실패에 실망한다고 해서 반드시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분노의 원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다. 나는 한국사회의 분노조절장애가 시민전쟁의 양태로 전개되는 사회적 갈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가장 커다란 갈등은 ‘이념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의 세 가지로 압축된다.

이념 갈등은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한다. 진영 논리를 무기로 살벌하게 싸우는 정치적 시민전쟁에서 한 진영은 경쟁자를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까닭에 선거의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정치적 경쟁자를 국가적 위협 세력으로 낙인찍는 극단적인 분열 상황에서 게임의 규칙 같은 것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원색적이고 야만적인 막말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품격 있는 위트와 정책대결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국민은 경쟁자를 적으로 여기는 당파적 양극화에 진저리를 치고 분노를 느낀다. 문제는 신물이 날 정도로 지긋지긋한 이념 갈등에 대한 분노가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로 변질한다는 점이다.

분명히 존재함에도 입에 올리길 꺼리는 세대 갈등과 젠더 갈등은 또 어떤가? 청년 세대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 우선인데도 정치인들은 청년 세대의 분노를 이용만 하려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적 상황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강변하는 기득권 세력의 능력주의는 폭력이다. 일자리의 부족과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세대 갈등은 종종 젠더 갈등으로 전이된다. 그 원인이 깊고 복합적인데도 젠더 갈등이 성별 전쟁의 양상을 띠는 데는 이들의 분노를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갈라치기 탓이 크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노는 분명 서로를 적으로 배제하는 진영으로 분열된 사회의 양극화에서 기인한다. 분노가 분명하게 가리키는 방향은 사회의 분열이다. 이러한 분노는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회 개혁의 생산적 자원이 될 수도 있다.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회 통합의 대안을 내놓는 정당은 분명 승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선판에서는 ‘사회 통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정당 간 적개심의 골이 깊어져 선거 이후에도 서로를 두려워해야 한다면, 분노라는 정치적 자원은 사회분열의 새로운 불씨가 될 것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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