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숫자로 상상한 것 너머에서부터
[경향신문]
가정으로 방문진료(왕진)를 나가기 전까진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에 와상의 환자분이 살고 계시는 건 잘 상상하지 못했다. 병원비는 저렴하지만 사설 구급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 한 번 병원 갈 때 교통비만 왕복 20만원이 든다는 것도, 그러다 보니 가는 차비라도 아끼고자 119를 타고 응급실을 찾게 된다는 것도, 응급상황이 아닌데 응급실을 자주 찾으니 응급실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도, 찬밥 신세 응급실이 꺼려져 정말 응급상황이 될 때까지 집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뇌졸중 이후 편마비로 누워 계시는 분을 처음 방문했던 날이었다. 바싹 마른 팔과 다리. 오랜 와상 생활로 가느다란 팔다리의 관절들이 모두 굳어져 있었다. 퇴원 후 지난 2년 동안 혈액검사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검사를 위해 팔꿈치의 혈관을 찾아보려 했으나 팔꿈치 관절이 굳어져 있어 잘 펴지지 않았다. 한참 주무르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 후에야 혈액검사를 할 정도로 팔오금이 드러나게 간신히 팔을 펼 수 있었다.
그분은 대학병원에서 인슐린을 포함해서 당뇨, 고지혈증, 치매와 관련한 약들을 처방받아 복용 중이었지만, 정작 교수님을 뵌 것은 2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는 아버지를 돌보는 딸이 대신 대학병원을 방문해서 혈당수첩을 보여드리고 약을 처방받아 오는 것이 다였다. 혈당수첩에는 잘 조절된 혈당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기가 막히게 조절되고 있는 혈당. 이 숫자로 대학병원에선 환자를 상상했겠지. 숫자로 환자를 상상하는 건 의사들 누구나 ‘조무래기’ 시절부터 훈련하는 일이다. 병동 당직을 설 때 간호사의 전화를 받으며, 나이부터 시작하는 온갖 숫자를 들으며 환자의 이미지를 눈앞에 그려본다. 환자를 병동에 가서 실제로 만나면, 내가 상상하던 환자와 판이할 때도 있고 흡사하다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차이를 의식해서 조금씩 줄여가는 훈련을 하는 시기가 젊은 의사의 수련 기간이기도 한데, 연차가 더해질수록 차이가 줄어들어야 스스로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병동과 환자의 집은 너무 다르다. 병동에선 처방된 만큼의 칼로리가 제공되지만 집에서는 아니다. 그러니 대학병원의 교수님이 혈당수첩의 숫자만 보고 상상한 환자의 상태와 현실의 그분은 너무 달랐다.
퇴원 후 집에서 혈당이 잘 조절되지 않자, 다시 뇌졸중이 올까봐 덜컥 두려워 딸은 식사량을 줄였고, 혈당수첩의 숫자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2년이 지나 내가 방문했을 시점에 그분은 바싹 말라 있었고, 빈혈과 단백질 부족, 영양실조 상태였다.
이건 학대가 아니다. 딸의 잘못도 아니다.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생겨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아버지를 돌봐오고 있는 딸이었다. 매일 꼼꼼히 혈당을 기록하고, 인슐린을 주사하고, 약을 챙기고, 식사를 먹여드리고,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순간순간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들을 쌓아왔던 것이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재활치료사, 영양사로 이루어진 우리 방문진료팀은 단백질 섭취를 늘리는 식단을 같이 고민하고, 휠체어에 앉을 수 있는 자세를 만들기 위해 굳어진 관절을 서서히 풀고 앉기 훈련을 시작했다.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 앉는 훈련도 했고, 혈당 조절 목표도 높였다.
환자에 대한 더 많은 ‘숫자’가 있다면, 물론 더 정확한 상상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어떤 숫자가 더 필요한지부터가 문제다. 무슨 숫자를 더 확인해야 할까를 알려면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암만 숫자를 많이 확보한다고 해도, 숫자만 봐서는 그 숫자를 꼼꼼하게 적어온, 하지만 지금은 지쳐 있는 딸의 표정 같은 건 알 수 없으니까. 우리의 관계는 숫자로 상상한 것 너머에서부터 시작된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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