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상담사에게 성폭력 상담하라?

조해람 기자 2021. 12. 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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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년부터 대학 인권센터 의무화
대부분 계약직 ‘고용 불안정’
폭력 사건 등 법적 부분까지
기존 상담사들에 처리 맡겨
“남의 인권 지키는 상담사들
정작 자기 인권은 못 챙겨”

경기도의 한 4년제 대학의 상담센터에서 심리상담사로 일하는 A씨의 직장 동료는 단 2명이다. 그나마도 모두 내년 2월 임기가 끝나는 계약직이다. 유일한 정직원인 A씨가 심리·진로 등 온갖 상담서비스와 폭력 예방교육, 행정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다. 심리상담사의 전문 영역이 아닌 성희롱·성폭력 등 인권침해 사건도 처리한다. A씨는 7일 “대학 평가 시즌까지 겹치면 새벽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일한다”면서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은데 번아웃이 온다”고 말했다.

과로에 허덕이는 A씨는 내년이 더 걱정이다.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내년 3월부터 모든 대학에 인권센터 설치가 의무화된다. 직장 내 괴롭힘부터 성고충까지 각종 인권침해 사건 처리와 인권 증진사업까지 담당하는 인권센터는 기존 상담센터보다 업무 범위가 훨씬 넓다. 계약직 동료들이 곧 그만두는데도 학교는 인력을 충원해 준다는 말이 없다. “인권 이슈는 상담실이 맡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만 나온다.

인권센터는 대학 내 인권침해 사건 조사·구제, 정책 연구·개발 및 자문, 교육과 홍보 업무 등을 담당하는 기구이다. 2012년 서울대·중앙대를 시작으로 2019년 12월 기준 전국 89개 대학이 인권센터를 두고 있다. 지난해 3월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2022년 3월까지 모든 대학은 인권센터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대학 인권센터 의무 설치를 앞두고 현장 상담사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아직 인권센터가 설치되지 않은 대학의 상담사들은 현 상황에서도 업무량이 임계점에 달했다고 말한다. 서울의 한 전문대 상담센터 상담사 B씨는 “행정업무가 너무 많아 전임 상담사가 상담을 못한다”며 “남의 인권을 지키는 이들이 정작 자기 인권을 못 챙기는 구조”라고 했다.

상담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인권센터 설치가 의무화되면 기존 상담 인력에게 돌아갈 짐만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각 대학이 인건비를 줄이려고 신규 업무를 기존 인력에게 떠넘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서울 4년제 대학 인권센터에서 18년째 일하고 있는 상담사 C씨는 “학교들 대부분이 조직도만 인권센터로 그려 놓고 실상은 결국 하던 사람이 계속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학생 상담, 장애학생 인권, 성고충 등이 모두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다. 앞서 대학에 설치돼 운영 중인 인권센터 직원들은 과로와 고용 불안정에 시달린다.

지난해 김은희 사단법인 인권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이 발표한 ‘대학 인권센터 운영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를 보면 인권센터 구성원 66.3%가 업무 관련 스트레스가 높다고 응답했다. 업무상 애로사항으로는 고용불안(51.1%)과 과도한 업무량(49.8%), 전문역량 부족(47.9%), 열악한 근무조건(26.6%)을 꼽았다. 구성원의 67.3%는 비정규직 신분이고, 71.2%는 근무기간이 2년 미만으로 조사됐다.

상담사들은 상담과 권리구제 업무가 개정 고등교육법 시행령에 분리돼 있지 않은 점이 근본 문제라고 지적한다. B씨는 “상담은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지만, 권리구제는 성폭력이나 직장 내 폭력 등을 다뤄 법적 문제도 같이 들어간다”며 “요구되는 전문성이 다르다”고 했다. 주무주처인 교육부는 각 대학의 인력 배치 문제까지 관여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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