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의 세상의 저녁] "2012년을 점령하라"

한겨레 2021. 12. 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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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의 세상의 저녁]내가 비공식 문건인 김근태의 '고문 기록'을 읽은 것은 1985년 겨울이었다. 그가 겪었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자주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런 충격 속에서도 경이로운 감정에 사로잡힌 것은 '고문 기록'의 언어에 서린 냉정함 때문이었다. 언어가 냉정해지려면 기록자가 언어의 표현 대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김근태는 고문을 겪으면서 동시에 고문을 겪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ㅣ소설가

영원한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2011년 12월30일 세상을 떠났다. 대학 3학년 때인 1967년 8월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제적과 강제징집을 당한 이후 44년 동안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냉철하면서도 뜨겁게 싸워왔던 그가 마지막 남긴 글은 그해 10월18일 자신의 블로그 ‘김근태, 희망을 말하다’에 올린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그는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두 번의 기회란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이었다.

2011년 가을이 오자 김근태는 앓기 시작했다. 1985년 9월에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가을에 늘 앓았지만 2011년의 몸 상태는 그전과 달랐다. 오랫동안 파킨슨병에 시달려왔던 그에게 뇌정맥 혈전증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민주화 동지이자 아내인 인재근은 “여러 가지 이유로 파킨슨병을 숨긴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고문 후유증이 감춰지면서 고문을 국가나 사회가 아닌 개인 차원의 문제로 한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김근태가 전두환 정권의 중심 표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이끄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활동이었다. 1970년대 학생운동 주역들이 1983년 9월 결성한 최초의 독자적, 공개적 사회운동단체였다. 그들은 창립선언에서 당시 입에 올릴 수 없었던 5월광주를 ‘1980년 5월의 피맺힌 민중항쟁’으로 표현하여 군부정권의 금기를 깨뜨렸다. 이듬해 5월에는 5·18묘역을 공식 참배했고, 서울에서는 추모식을 열어 광주 관련 사진, 판화 전시회와 함께 광주 자료집까지 판매했다. 이처럼 민청련은 군부정권과 싸움에서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대학생 위주로 이루어졌던 민주화운동의 평면적 구조를 입체적으로 변화시켜 운동 역량을 확대 강화시켰다. 여기에 대한 군부정권의 대응이 민청련을 학생 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와 엮어 자생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키려는 공작으로, 김근태에 대한 살인적 고문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김정남은 민주화운동의 역정을 기록한 <진실, 광장에 서다>에서 김근태를 “고문과 정면 대결하여 마침내 그 고문을 이겨낸 장엄한 기록을 몸으로 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비공식 문건인 김근태의 ‘고문 기록’을 읽은 것은 1985년 겨울이었다. 그가 겪었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자주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런 충격 속에서도 경이로운 감정에 사로잡힌 것은 ‘고문 기록’의 언어에 서린 냉정함 때문이었다. 언어를 견고하게 하는 냉정함은 언어의 내용이 독자에게 객관적으로 다가가게 하는 데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객관성은 진실의 바탕이며, 진실은 객관성에서 우러나온다. 타자기로 친 남루한 ‘고문 기록’을 읽어가는 동안 여러 차례 눈물이 맺힌 것은 기록에 배어 있는 진실성 때문이었다.

언어가 냉정해지려면 기록자가 언어의 표현 대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김근태는 고문을 겪으면서 동시에 고문을 겪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김근태의 정신적 에너지는 고문의 고통을 견디는 데만 쓰인 것이 아니었다. 고문을 겪는 모습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데에도 쓰였다. 이런 초월적 행위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고문은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르는 반인륜적 범죄로, 민주주의의 바탕을 파괴한다. 김근태가 고통받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고문받는 모습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알려 군부정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국가공무원들과 그 하수인들은 1985년 9월4일부터 26일까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실에서 김근태에게 여덟 번의 전기고문과 두 번의 물고문을 가했다. 그들은 김근태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김근태의 냉철한 인식이 초월적 행위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홀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함께 겪고 있다는 생각이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했고, 그 의미가 초월적 행위로 나아가는 에너지로 작용했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9월26일 검찰로 송치된 김근태는 서울지검 5층 승강기에서 내리는 순간 인재근을 만난다. 김근태가 그 만남을 ‘기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고문을 겪는 동안 죽음을 향해서만 흘렀던 시간이 그 순간 역류하면서 삶을 향해 빠르게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인재근은 9월4일 행방불명된 김근태를 찾아다니다 치안본부에서 그의 구속일자를 알아내어 구속 만기일 며칠 전부터 검찰청에서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 다리를 질질 끌었던 김근태는 4층 피의자 대기실로 느릿느릿 내려가는 동안 인재근에게 고문당한 이야기와 함께 전기고문의 흔적인 몸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짧은 시간에 참혹한 고문을 ‘통째로 이해’한 인재근은 그날 민청련 회원들과 함께 성명서·머리띠·펼침막을 만들고, 다음날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장에 외신기자, 정치인, 노동자, 학생, 장기수 가족과 유가족들이 찾아오면서 남영동의 고문이 국내외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 사건으로 엄청난 정치적, 도덕적 타격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1986년 6월 권인숙의 성고문 폭로로 휘청거렸고, 1987년 1월 박종철의 죽음에 이르러 무너지기 시작했다.

2018년 12월21일 오후 5시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난 옛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실에서 김근태 7주기를 맞아 ‘근태서재 시 소리 숲’이라는 이름으로 추모전이 열렸다. 이 추모전의 큐레이터는 김근태의 딸 김병민이었다. 김병민은 아버지의 고문 기록서 <남영동>을 1994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은 후 고문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버렸고, 무서움에 오랫동안 아버지의 고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1호선 전철을 타고 가던 중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을 정도로 트라우마가 깊었던 김병민이 아버지가 고통당했던 대공분실 515호실을 ‘무덤과 묘비로 상징된 추모의 공간이자, 시를 낭송하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 빛을 쏘아올리는 희망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예술 작업을 기획한 것이었다.

김근태 10주기를 앞둔 지난 12월4일 그의 민주주의의 삶을 도서관, 전시관, 기록관에 담는 복합문화공간 ‘김근태기념도서관’(서울 도봉구 도봉산길 14)이 문을 열었다. 김근태의 모든 꿈은 민주주의 안에 있었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꿈의 집’이었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김근태의 마지막 말 속에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간절한 꿈이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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