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인플레이션 압력, 유로화 무제한 발행의 종말을 예고
배경 설명
세계 양대(兩大) 중앙은행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유럽중앙은행(ECB)의 정책 방향이 엇갈렸다. 두 중앙은행은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라는 초유의 위기를 맞아 양적 완화에 나섰다. 그러나 최근 연준은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테이퍼링(양적 완화 점진적 축소)을 시사한 반면, ECB는 여전히 긴축 정책에 부정적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11월 19일(현지시각) 유럽은행회의에서 “상황을 주의 깊게 모니터링하고 있다”면서도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한 긴축 정책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인플레이션이 공급망 병목현상에 따른 것인 만큼 중앙은행의 긴축 정책이 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이렇다 할 변화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오히려 라가르드 총재는 “조기 긴축 정책은 가계 소득에 대한 압박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ECB가 현 상황을 낙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유럽연합(EU)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독일의 경우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 베이비부머 세대(1955~64년생) 은퇴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 원자력발전소를 포함한 모든 화석연료의 단계적 폐지로 인한 비용 부담 등이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①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물가 상승을 감안해 테이퍼링을 시사했음에도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인플레이션이 지속할 위험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라가르드 총재는 공급망 병목현상만 극복하면 인플레이션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시적인 문제라며, ECB는 재정 정책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마치 갑자기 달아나는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쥔 마부의 모습과 같다. 달리던 말이 지쳐 결국 멈출 거로 생각하는 것이다.
②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따르면, ECB는 모든 상황에서 물가 안정성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일시적인 물가 급등이더라도 이를 외면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또 연준과 달리 ECB는 법적으로 물가 안정성 목표와 다른 재정 정책을 추구하기 어렵다.
공급망 병목현상은 세계 여러 항구에 내려진 격리 조치의 영향이 크다. 특히 중국은 더 그렇다. 항구에 도착한 선박이 화물을 내릴 수 없게 되자, 유럽 경제가 공급해야 하는 중간재를 실어 나르는 게 불가능해졌고 국제 해상 운송 운임은 2019년 이후 8배 상승했다. 병목현상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내려진 유럽 내 도시 봉쇄 조치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유럽산 목재와 건축 자재가 부족해졌다.
2021년 가을, 독일경제연구소 Ifo가 진행한 설문 조사를 보면 독일 제조업의 70%가 원료 확보 및 중간재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년 전 동일한 설문 조사와 비교하면, 무려 20%포인트가 높은 수치다. Ifo는 이번 공급망 병목현상으로 인해 2021년 독일이 400억유로(약 55조원) 규모의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고 전망했다. 이는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1.15%에 달하는 금액이다.
분명 공급망 병목현상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팬데믹 기간에 대규모 부양책과 구제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지난 2년간 독일 정부는 독일 GDP의 약 10%에 해당하는 규모의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했고, 같은 기간 유럽연합(EU) 역시 EU GDP의 4.5%에 해당하는 재정 지원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정책 자금 대부분이 ECB에서 초저금리로 발행한 현금으로 마련됐기 때문에 국가 부채는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대규모 재정 지원 정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공급망 병목현상을 고려하면 정책 결정자들은 브레이크를 밟은 채로 액셀 페달도 밟은 셈이다. 그 결과 물가가 오르는 반면 경기 회복은 더딘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현상이 이어졌다.
올해 10월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6.2% 올랐다. 이는 1990년 12월 이후 30년 10개월 만에 가장 큰 상승 폭이다. 이런 상황은 유럽도 마찬가지다. 10월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국) 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4.1% 상승했고, 같은 기간 유럽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독일은 4.5% 올랐다. 더욱이 독일의 10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18.4% 올랐는데, 이는 195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프랑스·이탈리아·핀란드·스페인 등 유럽의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 상황이지만, ECB가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최악인 건 이 같은 물가 상승이 일시적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급망 병목현상이 내년 여름에 극복된다 하더라도 노동조합은 올해 인플레이션이 반영된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것이다. 이로 인해 앞으로 몇 년간 물가와 임금이 동시에 오를 수 있다.
게다가 물가 상승률이 처음으로 완화되는 시기가 최소 내년 가을일 텐데, 새로운 위험도 경계해야 한다. 만약 ECB가 충분히 예측되는 연준의 금리 인상 기조를 따르지 않는다면 유로화 가치는 하락하고 수입 가격은 상승할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1955~64년생)의 은퇴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도 고려해야 한다. 독일의 원자력발전소를 포함한 모든 화석연료의 단계적 폐지도 비용 부담으로 작용해 가격 상승 요인이 될 수 있다.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유럽 경제와 ECB는 추가적인 부채 급증을 막아야 한다. 만약 정책 결정자들이 그들의 목표 달성을 위해 돈을 계속 발행하길 원한다면 그만큼의 다른 지출을 줄여야 한다. 또한 ECB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아 과거 수준의 금리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면 ③ 크라우딩 아웃 메커니즘으로 대체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오늘날 물가 급등은 몽상에 불과했던 무(無)에서 조달한 자금에 대한 종말을 의미한다. 유로화 무제한 발행 시스템의 좋은 시절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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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①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이 11월 30일 테이퍼링 속도를 끌어올리겠다고 시사했다. 그는 이날 미국 상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현재 경제가 매우 견고하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테이퍼링 속도를 내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수개월 동안 “인플레이션은 일시적(transitory)”이라며 통화 완화 정책을 유지해왔다. 그의 시각이 크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파월 의장의 테이퍼링 가속화 발언으로 연준이 금리 인상 시기를 앞당길 것이라는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② 유럽공동체(EC·European Community)가 시장 통합을 넘어 정치·경제적 통합체로 결합하기 위한 터전이 된 조약이다. 1991년 12월 11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 EC 정상들이 모여 가조인한 데서 이름을 따왔다.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ECB 창설과 단일통화 사용의 경제통화동맹, 노동조건통일의 사회 부문, 공동방위정책, 유럽시민권 규정 등 네 개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조약을 토대로 느슨한 연대였던 EC가 1995년 강력한 경제연합인 유럽연합(EU·European Union)으로 명칭을 바꾸고 공동의 외교안보 정책 등 정치 통합을 선포했다.
③ 정부가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해 국채 이자율이 상승하면 민간 자금이 국채로 흡수되기 때문에 결국 금리 수준이 전반적으로 상승, 기업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는 상태를 말한다. 금융이 완화되고 있는 상태라면 문제 되지 않지만, 긴축이 실시되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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