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의 경제 프리즘 <1>] 토지 개발의 경제학: 공주 갑부 김갑순과 헨리 조지
1│토지 가치 높인 공주 갑부 김갑순
TV 드라마 ‘공주 갑부 김갑순’은 1982년 3월 22일부터 1982년 6월 15일까지 방영된 드라마다. 조선 시대부터 20세기까지 거부들의 일대기를 다룬 거부 실록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이다. 박규채라는 연기파 탤런트가 공주 갑부인 김갑순 역을 맡아 열연했는데 그의 극 중 대사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야)”라는 일본 말이 그 무렵 터진 ‘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과 겹쳐지면서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필자도 이 드라마를 보았는데, 극 중에서 그는 진짜 도둑뿐 아니라 위선자와 언행 불일치한 인사 등 믿지 못할 다른 모든 이를 가리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김갑순의 출세기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19세기 후반 공주에서 태어나 공주 감영의 관노였던 그가 타고난 성실성과 주위에 베푼 호의에 힘입어 그리고 나중에는 매관매직을 통해 아전에서 군수로 승진했다는 것은 일치한다. 공주, 아산 등 6개 지역 군수 등의 관직을 수행하며 얻은 정보와 타고난 식견으로 대전 지역의 황무지를 계속 사들였고 그의 땅 위로 1905년 경부선이 통과하고 역이 생기면서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다. 곧이어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고 당시 대전 땅의 3분의 1 이상이 그의 땅이어서 그의 부는 계속 커졌고 그렇게 번 돈으로 다시 땅을 사들였다. 1930년대에 그는 공주, 대전 일대에 1000만 평 이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땅값이 오를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소유지의 상당 부분을 온천 개발(온양온천) 등으로 직접 ‘가치를 높이는 노력’도 병행했다.
그는 돈으로 산 관직이었지만 선정을 베풀었다고 알려졌다. 자신이 돈이 많아 관내 주민들의 돈을 착취할 이유도 없었고 주민들 사이에 분쟁도 공정하게 해결해주어 신망도 두터웠다고 한다. 이런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로서 대가를 치르는 과정에서 고초를 겪은 데다, 토지 개혁, 화폐 개혁으로 소유했던 대부분의 땅과 재산을 잃어버렸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은 타고난 명줄은 길었는지 90세가 되던 해인 1961년 어느 날 먹던 찹쌀떡 하나가 목에 걸려 마감됐다. 호사가들은 그가 재복, 관운, 장수의 복 그리고 죽는 복도 모두 타고났다고 평했으며, 이는 보기 드문 명당인 그의 선친 ‘묘바람’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선영이 있는 ‘땅’은 풍수가들의 필수 답사 코스가 되기도 했다.
2│‘토지 공개념’ 뿌리 된 헨리 조지
미국의 경제 사상가이자 정치인이었던 헨리 조지는 1839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던 부모의 종교적 교육 방침에 반발해 14세의 나이로 학교를 그만둔 그는 15세부터 하급선원으로 배를 타기 시작해 호주, 인도 등을 다니다가 19세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정착, 신문사의 식자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후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편집인까지 됐고, 직접 신문사를 차리기까지 했으나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등 극심한 생활고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1879년 저서 ‘진보와 빈곤’이 300만 부 이상이 팔리면서 생활고에서 벗어났고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1886년 뉴욕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1897년 재도전했으나 뉴욕시장 선거 사흘을 앞두고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떴다. 생전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그의 죽음에 20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몰렸고 장례 행렬이 지나간 브루클린 브리지까지 사람이 가득 차 움직일 수 없을 정도여서, 링컨 이후 가장 큰 장례 행렬로 기록됐다고 한다.
그는 가난의 원인을 토지 소유에서 나오는 지대(地代)로 봤다. 서부 열차 선로 부설에 동원된 노동자의 임금 수준이 오르는 것보다 그 주위 땅값 상승으로 토지 소유주가 얻는 이득이 훨씬 크게 증가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모두 환수해 국가 운영의 재원으로 삼되, 다른 모든 생산적인 행위는 비과세하면 빈곤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봤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후에 ‘토지 공개념’의 단초가 됐고 후세에 적지 않은 추종자(조지안)를 낳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 그의 이름을 딴 학회가 설립됐고, 이 모임의 회장을 역임했던 사람이 참여정부 시절 경제수석에 임명돼 그의 이념을 실천하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부동산값이 폭등하는 등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현 정부에서도 이 ‘조지안’이 부동산 정책을 맡아 그들의 신념을 실천한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지금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왔던 정치인을 포함해 전⋅현직 정치인이 헨리 조지 신봉자를 자처하며 토지 소유권을 아예 부정하거나 개발 이익을 완전히 환수하자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얼치기 조지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다. 정작 헨리 조지 자신은 마르크스와 달리 땅의 국유화를 반대했고, 집을 지어 소유하는 등 그 땅의 가치를 올리는 어떤 행위(가령 개발 이익)도 ‘생산적인 행위’이므로 과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현 정부 조지안과 몇몇 여당 정치인의 주장과는 큰 거리가 있다. 더구나 부동산 관련 세금 이외에 이 정부 들어 부쩍 무거워진 소득세·상속세, 준조세 격인 4대 보험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땅투기꾼이라 지탄받을 김갑순의 경우 도덕적인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헨리 조지의 주장대로라면 적정한 세금만 낸다면 그의 토지 소유는 문제가 안 되며 온양온천 개발 이익 같은 것은 과세 대상이 아니게 된다. 실제로 헨리 조지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토지를 압수할 필요는 없다. 임대료를 환수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썼다. 얼마 전 터진 ‘대장동 사건’의 경우 이러한 ‘얼치기 조지안’의 시각에서 접근해 벌인 개발 방식과 비교가 된다. 완전히 민간의 손에 맡겨 개발한 것이 헨리 조지 이념에 더욱 부합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민간의 손에 맡겨 개발한 것이 토지 소유주의 이익을 더 늘리기는 했지만 결국 양도세 및 개발 이익의 법인세 환세 등으로 전체적인 조세 수입만 오히려 더 커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내년 3월 결전을 앞두고 요즘 대선 정국의 양상이 갈수록 달아오르고 있다. 그런데 이번 대선처럼 여야 모두에서 경선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렇게 땅이 문제가 된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여야를 막론하고 땅투기를 한 의원들이 우르르 적발되더니, 유망한 신예 정치인으로 주목받던 야당의 국회의원은 출마를 선언했다가 부친의 땅 투기 의혹으로 의원직을 내놓았다. 게다가 적발된 상당수 의원이 부동산을 죄악시하던 이들이어서 위선의 냄새도 풍긴다. 치열한 경선 과정을 거쳐 여야에서 결정된 두 후보도 모두 땅에 관련된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당 후보는 초기 투자자들이 천문학적인 수익을 가져간 성남의 대장동 등의 개발에 관련돼 있고, 야당 후보는 과거 처가의 땅을 둘러싼 계약을 두고 의혹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전자의 경우 야당의 중진의원의 아들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큰 규모 퇴직금을 받은 것이 밝혀지며 해당 의원은 사퇴까지 하게 됐다. 드라마 ‘공주 갑부 김갑순’의 대사인 “민나 도로보데스”라는 말이 자꾸 뇌리에서 맴돌게 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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