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결과가 원인이다

2021. 12. 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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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좋아하는데는 이유 없어
좋아하게되면 좋은 이유 생겨
대선 앞 헤게모니 갈등에 혼란
누가 가치 품고 있나 찾아내야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건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유는, 좋아한 그 이후에 만들어진다. 일단 좋아하고 나면 왜 좋아하는지 그 원인이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성격이 좋아서, 코가 멋있어서, 눈을 감고 있을 때 분위기가 매력적이어서 등, 그런 이유들이 설마 먼저 존재했을 리 없다. 게다가 그 이유는 계속 갱신된다. 좋아하는 마음, 그것이 원인이고, 좋아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던 것은 좋아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인 셈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도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있다. 콘서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적지 않지만, 괜히 갔다가 연로한 몸에 탈이 날까 두렵기까지 하다. 감동을 버틸 만한 준비가 아직 안 돼 있다. 처음엔 그의 맑은 분위기가 좋았다. 노래할 때 눈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이 좋았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듯 참는 표정도 읽혔다. 그건 마치 체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 잠깐의 침묵이 그의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애초에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일단, 그를 좋아했고, 그 다음에 그런 이유가 하나씩 늘어났다. 그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다닐수록 이유는 계속 불어났다. 그 이유는 하나같이 억지이고 궤변이었지만, 그 과잉은 제법 섬세해서 팬으로서의 나르시시즘도 적절하게 충족시켜 주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어느 순간 위험신호가 발동했다. 그동안 내가 통합했던 그에 대한 이미지에 균열을 내는 정보가 나타난 것이다. 오래전 유튜브 영상에서 본 그는 맑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칠었으며 다소 히스테리컬하기까지 했다. 충격이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충격이 오래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애초 그의 이미지를 거스르는 정보를 내 뇌는 더 아이러니하게 통합하고 있었다. “그래, 저런 모습도 있어야지, 그래야 더 멋있지. 무릇 멋짐은 모호성에서 오는 거지.” 나는 그의 이미지를 더 풍요롭게, 심지어는 메타적으로(한 차원 더 높여서) 재조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중에서는 김수영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아직 다 밝혀내지 못했다. 아직도 좋아하는 이유가 쌓여가는 중이다. 나의 학생들 말로는 대학생이 논문을 쓸 때 가장 기피하는 문학인이 ‘김수영’이란다. 그에 대한 논문이 너무 많아서 김수영 문학으로 논문을 쓰려면 봐야 할 선행 텍스트가 너무 많다는 뜻이다. 급기야 ‘수영 금지’라는 용어가 생겼다고 내게 가르쳐주었다. 무릇 ‘금지된 것’이 매력적인 법이다. ‘금지’는 ‘과잉’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김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시대 김수영을 좋아하는 무수한 사람들과 함께 더 풍성하게 찾아질 것이다.

김수영은 “‘김일성 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다” 했고(‘김일성 만세’), 4·19혁명의 기쁨을 주체 못해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며 외쳤고, 여전한 자신의 소시민성을 자조하면서 “왕궁의 음탕 대신에(…)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한다고 절망했고(‘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또 속고 만다”(‘성’)고 괴로워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을 좋아하면서 주목하지 않았던 가치를 좇게 되었다는 점. 그 아티스트를 좋아하면서는 타자에게 귀 기울이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노래할 때, 단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동료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노래에 감응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노래하기는 노래듣기에 다름 아니었다. 김수영을 좋아하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진실을 끝까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그의 시를 파고들었을 때에만 찾을 수 있는 장난기와 소년스러움도 사랑하게 됐다. 그 장난기와 소년스러움은 고통을 기반으로 하기에 더 마음에 울려 왔다.

대선이 90여일 남았다.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 마음, 그것이 원인이다. 왜 지지하는지 그 이유는 오히려 결과이다. 대통령 후보를 아티스트나 시인처럼 좋아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그렇더라도 초두의 각인 효과는 꽤 강렬해서 첫 호감도는 잘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를 찍었다면 그에 대한 타당한 이유는 더 이어지고, 누군가가 싫었다면 싫은 이유는 무수히 쏟아진다. 자신의 지지를 의심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마음을 한번 점검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지지하는 마음으로 인해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불편하고 민망하다. 그들이 가치를 실현시키려는 것인지, 헤게모니 다툼을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헤게모니 갈등에서 오히려 그들이 무슨 가치를 지향하는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정치인의 헤게모니 갈등의 중심축만이 아니라 무의미해 보이는 장면과 상황을 주시한다면,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침묵을 놓치지 않는다면, 정치철학자 지젝의 말대로 ‘삐딱하게’ 본다면, 헤게모니 구조의 틈에 난 ‘실재’를 포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치’냐 ‘헤게모니’냐, 이것은 그릇된 양자택일이다. 가치는 헤게모니와 섞여 있고, 헤게모니는 가치 속에도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이 헤게모니 갈등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가치를 품고 있는가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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