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는 원자재값에 적자 쌓여..이번에도 납품가 못올리면 문닫을 판"
계약기간 동안 인상분 반영 사실상 불가
내년에도 그대로면 줄도산 위기 내몰려
업계 "납품단가연동제 도입 절실" 호소
“지난해에는 1㎏당 1,500원 정도였던 규소철 가격이 최근 5,000원까지 치솟았습니다. 하지만 납품가는 요지부동입니다. 제품을 공급할수록 손해지만 만약 납품을 중단하면 거래 단절의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어 비용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강철 속의 산소를 없애는 데 쓰는 규소철을 대기업에 납품하는 지방 중소 제조 업체 대표는 연말 납품가 협상을 놓고 속앓이를 하고 있다. 납품 단가의 경우 1년에 한 번 결정하면 중간에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다 해도 반영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내년 공산품 가격 인상을 예고한 가운데 중소기업은 연말을 맞아 대기업과의 납품 단가 협상에서 원자재 인상분을 반영할 수 있을지 초긴장 상황이다. 이미 코로나19 이후 급등한 원자재 가격으로 채산성이 악화된 중기는 내년까지도 납품 단가가 현실화되지 않을 경우 ‘한계기업’이 급증하는 것은 물론 줄도산을 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6일 중소기업계에 따르면 중기의 절반 가까이가 급등한 원자재 가격이 납품 대금에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중기 647개를 대상으로 납품 단가 반영 실태를 조사한 결과 96.9%는 올해 공급 원가가 지난해 말보다 올랐지만 이 중 45.8%는 납품 대금에 비용 상승분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납품을 해도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아 폐업을 결정하는 업체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기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의 경우 원자재를 수입해서 그 중간재를 납품하는 구조가 대부분인데 매입원가가 매출원가보다 높아졌다”면서 “원자재 가격이 50%에서 많게는 100%까지 올랐다”고 말했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규모 단조 업체의 경우 포스코가 올해만 철 가격을 네 번인가 다섯 번이나 올렸다”며 “한 번만 더 올리면 시위를 한다고 한 후로 인상 통보를 안 한 것 같다. 이제 한계에 내몰린 기업이 너무 많고 이대로는 많은 기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3D프린터 장비, 기관차 엔진 등을 만드는 한 중소기업 대표는 “50년 가까이 사업을 해왔지만 이렇게 원자재 가격이 상승한 것은 처음”이라며 “올라버린 원자재 가격이 내려올 생각을 안 하지만, 납품 가격 인상률은 몇 년째 물가 상승률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 자동차 부품 업체 대표는 “원재료 가격이 크게 올라 올해 협상에서 납품가를 못 올리면 적자 늪에 빠져 회사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반도체와 자동차 업계의 중견 기업이나 매출 규모가 큰 중소기업들도 연말 납품 단가 협상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들 중견·중소기업들은 원재료 가격 급등에 따른 납품 단가 인상을 협상 중이지만 대기업은 인상률을 최소화하려는 분위기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에 반도체용 특수 가스를 공급하는 A사의 영업이사는 “품목마다 다른데 최소 10% 이상 인상을 요구하고 있고 특정 품목은 50% 이상을 요구 중”이라며 “지난달부터 계속 협상 중이지만 아직 결론이 안 나서 연말까지 진통이 이어질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올해는 원자재 값도 많이 오르고 물류 상황도 안 좋아 부품가 상승 요인이 그 어느 해보다 많다”면서 “대기업도 납품 단가 상승 요인을 이해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반도체 분야 등 글로벌 업체와의 경쟁이 거센 업종의 경우 사실상 납품가 인상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납품가를 유지하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보는 중소기업들도 적지 않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한 중견 반도체 부품 업체의 임원은 “원재료 값 인상으로 납품가 인상이 꼭 필요하지만 대기업과 협상에 들어가면 납품가를 현행 가격대로 유지하는 것도 힘든 분위기”라고 토로했다.
원자재 가격 인상분이 납품 단가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경우 중기 도산이 속출할 것이라는 우려가 이처럼 높은 상황에서 납품단가연동제 도입이 절실하다는 게 업계의 호소다. 추문갑 중기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대기업은 올해 사상 최대 이익을 기록하고 있지만 중기의 경우 원자재 가격 급등 등으로 채산성이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며 “결국 납품단가연동제는 상생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추 본부장은 이어 “결국 대기업도 협력 업체의 경쟁력이 강화돼야 경쟁력이 강화된다”며 “대기업이 상생 차원에서라도 납품 업체의 원가 상승분은 어느 정도 현실화시켜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도 납품단가연동제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는 분위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비롯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역시 이를 약속한 바 있다. 실제로 김경만 민주당 의원은 최근 납품단가연동제를 도입하기 위해 ‘대·중소기업 상생 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상생협력법)’과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하도급법)’ 2건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연승 기자 yeonvic@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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