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메르켈 시대의 유럽 통합과 유로화 가치[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지난 16년간 유럽 통합의 맹주 역할을 담당해 왔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떠났다. 후임에는 좌파 성향인 사민당의 올라프 슐츠가 이끄는 연립 정부가 포스트 메르켈 시대를 이끌 것으로 예상되면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통합에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독일 정권 교체·브렉시트에 흔들리는 유럽
올해 유럽에는 유난히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던 가운데 유럽연합(EU)에서 첫 탈퇴국이 나왔다. 회원국들이 난민과 테러, 경기 침체 등에 시달리고 있지만 해결책은 고사하고 대응조차 못하는 ‘좀비 EU’ 때문이다. 영국 내부적으로는 정치인을 비롯한 기득권층에 대한 환멸도 컸다.
세계의 관심은 영국의 EU 탈퇴가 세계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여부다. 경제적 관점에선 당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올해 1월 31일부터 영국이 EU 3대 핵심 기구인 집행위원회·유럽 의회·유럽 이사회 등과 산하 기구를 떠났지만 관세 동맹은 연말까지 유지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년부터다. 슐츠 정부의 출범으로 영국과 EU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불확실해져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이 높아졌다. 유럽 통합은 단일 세계 경제 현안 중 역사가 가장 길다. ‘하나 된 유럽 구상’이 처음 등장한 20세기 초반을 기점으로 본다면 110년, 구체화된 1957년 로마 조약을 기준으로 한다면 60여 년이 넘는다.
로마 조약 체결 후 유럽 통합은 두 가지 갈래로 추진돼 왔다. 먼저 회원국을 늘리는 ‘확대’ 단계로, 초기 7개국에서 28개국으로 늘었다가 영국의 탈퇴로 27개국으로 줄었다. 다른 하나는 회원국의 관계를 상승시키는 ‘심화’ 단계다. 유럽 경제 통합(EEU)에 이어 유럽 정치 통합(EPU), 유럽 사회 통합(ESU)까지 달성한다는 원대한 구상이다.
하지만 유럽통합헌법에 대한 유로 회원국의 동의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주권 문제로 심화 단계가 난관에 부닥쳤다. 절름발이 통합(통화 통합+재정 미통합)으로 언젠가 불거질 것으로 예상됐던 재정 위기가 2011년 터졌다.
유럽의 통합 과정에서 영국의 역할을 감안하면 브렉시트를 계기로 확대 단계에서도 시련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유럽 통합의 맹주 역할을 했던 메르켈 총리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유럽 재정 위기, EU 회원국 탈퇴 가속화
유럽 재정 위기를 겪으며 이미 탈퇴 문제로 홍역을 치렀던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가 회원국 탈퇴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다. EU 탈퇴 후 영국 경제가 독자 회생한다면 EU 회원국의 탈퇴 움직임은 더욱 빨라질 수 있다.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회원국 내 분리 독립운동도 고개를 들고 있다. 첫 주자는 영국의 스코틀랜드다.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 북부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와 근접한 동부 벨트 등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회원국 탈퇴에 이어 분리 독립운동마저 일어난다면 유럽 통합은 붕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 EU 탈퇴와 분리 독립은 쉽지 않은 문제다. 1995년 캐나다 퀘백과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투표에서는 여론 조사 결과와 달리 반대가 더 많았다. 미국도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의 분리 요구가 나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연방 정부 차원에서 검토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영국의 EU 탈퇴를 이례적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첫 회원국 탈퇴라는 최대 난관에 봉착한 EU는 △현 체제 유지 △붕괴 △강화 △질서 회복 등의 시나리오를 놓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으로 확실시된다. 유럽 재정 위기와 브렉시트 등으로 노출된 문제를 회원국이 조율하지 못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조셉 바이너 등의 연구에 따르면 유럽처럼 경제 발전 단계가 비슷한 국가끼리 결합하면 무역 창출 효과가 무역 전환 효과보다 커 역내국과 역외국 모두에 이득이 된다. 통합에 가담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앞으로 유럽 통합은 회원국의 현실적 제약 요건을 감안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잔존 회원국은 유럽 통합의 차선책인 ‘F-EU(France+EU)’ 방안을 빠르게 추진할 수도 있다. ‘F-EU’는 프랑스를 EU에 잔존시키면서 난민·테러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독자적인 해결권을 갖는 방식이다. 프랑스는 EU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국의 현안을 풀어 갈 수 있어 ‘탈퇴(exit)’보다 더 현실적인 방안으로 떠올랐다.
‘F-EU’가 선택된다면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등 국수주의 움직임이 거센 회원국이 이 방식을 우선적으로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특히 ‘F-EU’에 이어 ‘G-EU(Germany+EU)’까지 적용된다면 유로랜드에 이어 EU 차원에서도 ‘이원적인 운용 체계’를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원적 운용 체계는 유로화가 도입되기 이전에 운영됐던 유럽 조정 메커니즘(ERM)과 같은 원리다. 독일처럼 경제 여건이 좋은 회원국에는 경제 수렴 조건을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고 그리스 등과 같은 나쁜 회원국은 느슨하게 운영하는 것이다.
유로랜드의 기본 골격도 보완될 가능성이 높다. EEU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통화 통합과 재정 통합을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주무 부서로 유럽중앙은행(ECB)과 ‘유럽재정안정기구(EFSM, 가칭)’, 상징물로 유로화와 유로 본드 간 ‘이원적 매트릭스’ 체계가 갖춰질 것으로 보인다.
유럽 통합에 균열이 나타난다면 유로화 약세는 불가피하다. 달러화 가치를 평가하는 가장 보편적인 잣대인 달러 인덱스에서 유로화 비율이 58%인 점을 감안하면 유로화 약세는 달러화 강세와 직결된다.
올해 6월 90선이 붕괴됐던 달러 인덱스가 최근에는 96대까지 상승했다. 내년 들어 유로화 환율이 등가 수준(1유로=1달러)으로 하락한다면 달러 인덱스는 100선에 재진입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원‧달러 환율도 달러당 1200원 선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역시 유럽의 변화 상황에 집중해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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