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KBS 그래픽 디자이너 부당해고 맞다" 지노위 판정

김효실 2021. 12. 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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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 동안 7차례 계약 갱신한 ㄱ씨
KBS 계약 종료 통보에 '부당해고 구제신청'
지노위 "프리랜서 계약 맺었지만 사실상 근로자"
방송계 '무늬만 프리랜서' 관행에 경종
지난해 4월 방송사들이 모인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거리 캠페인. 청주방송 고 이재학 피디 사건 대책위 제공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더라도 실제로는 방송사에 종속돼 일했다면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정이 또 나왔다. <한국방송>(KBS) 디지털 뉴스에 쓰이는 이미지를 만들었던 그래픽 디자이너가 ‘부당해고’를 인정받은 것이다.

<한겨레>가 6일 입수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 판정서를 보면, 지노위는 지난 10월12일 그래픽 디자이너 ㄱ씨가 <한국방송>을 상대로 낸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받아들였다.

2년3개월 일하고도 ‘구두 해고’

ㄱ씨는 2019년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2년3개월 동안 <한국방송> 디지털 뉴스부 소속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한국방송>은 지상파 티브이(TV)에 내보내는 뉴스 말고도, 자사 누리집, 포털, 유튜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디지털 플랫폼에 맞춘 기사를 생산·유통하고 있다. ㄱ씨는 이러한 디지털 기사 안에 들어가는 사진, 인포그래픽과 기사의 섬네일(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클릭을 유도하려고 만드는 작은 이미지) 등을 만들었다. ㄱ씨와 다른 프리랜서 디자이너들 모두 디지털 뉴스부 소속이었지만, 사회부, 국제부 등 취재 부서에 배치돼, 해당 부서 기자들과 협업했다.

ㄱ씨는 2019년 3월 첫 달은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다가, 프리랜서 디자이너 공모를 통과해 4월부터 프리랜서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프리랜서 계약은 짧으면 1~2달짜리부터 6개월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총 7차례에 걸쳐 갱신됐다. 업무 형태는 일관됐지만, 계약 기간은 들쑥날쑥 불안정했던 셈이다. 그러다 지난 5월 <한국방송>은 ㄱ씨에게 “6월 말 디자이너 위임계약 사업을 종료한다”는 이유로 계약 해지를 구두로 통보했다. ㄱ씨는 “한국방송의 조치는 부당해고”라고 주장했고, 지노위는 이를 받아들였다.

<한국방송> 유튜브 페이지 갈무리

“근무시간·장소 일정, 고정급여 지급…근로자에 해당”

지노위는 △ㄱ씨의 근무시간(오전 9시~오후 6시)과 근무장소(한국방송 사옥)가 정해져 있었고 △디지털 뉴스의 업무 특성상 기자들과의 협업이 필요해서 ㄱ씨의 업무만 따로 떼어 위탁할 성격으로 여겨지지 않는 점 △계약서상으로는 “주 30건의 콘텐츠를 기준으로 1건당 2만원으로 계산해 매주 초에 지급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매월 고정급을 받은 점 등을 근거로, ㄱ씨가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노동자(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봤다.

<한국방송> 쪽은 “이미지·그래픽 제작의 업무 의뢰 구조상 비전문가인 기자가 전문가인 디자이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기자가 디자이너를 지휘·감독한다는 것은 업무 특성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지노위는 ㄱ씨가 7회에 걸쳐 계약을 갱신하며 일한 기간이 기간제법상 사용 기간인 2년을 넘겼기에, ㄱ씨에 대해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전환됐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지노위는 <한국방송>의 ‘계약 종료’ 통보는 ‘해고’에 해당하며, 서면이 아닌 구두로만 통지했기에 ‘부당해고’라고 덧붙였다. 단, 지노위는 ㄱ씨가 기간제 근로자로 일한 처음 한 달은 연속 근무 기간에 포함하지 않았다. ㄱ씨가 방송사의 프리랜서 디자이너 공모에 지원해 공개경쟁으로 뽑힌 점, 전보다 보수가 약 30% 상향된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청주방송 고 이재학 피디 대책위가 지난해 3월11~19일 피디·작가 등 비정규직 노동자 821명을 대상으로 한 ‘방송계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실태 조사’ 결과 일부

‘무늬만 프리랜서’…신분제 같은 차별

지노위 판정은 공영방송도 피해갈 수 없는 방송계 ‘무늬만 프리랜서’ 관행에 재차 경종을 울린 것이다. 2016년 씨제이이엔엠(CJ ENM) 이한빛 피디, 2017년 박환성 독립피디, 2020년 청주방송 이재학 피디 등이 방송계 불안정·취약노동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뒤, 방송계 곳곳에서 사법·행정기관을 통한 ‘노동자성’ 인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이재학 피디는 올해 5월 생전에 청주방송을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항소심에서 노동자성과 ‘부당해고’를 인정받고 승소했다. 올해 3월에는 방송작가 2명이 최초로 중앙노동위원회로부터 “노동자가 맞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한국방송> <문화방송>(MBC) 등 방송사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일부의 정년을 보장하는 등 처우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근속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기존 정규직 직원과 처우가 다른 직분에 포함돼 사실상 ‘신분제’ 같은 차별이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문화방송>의 그래픽 디자이너 7명도 지난해부터 서울서부고용노동지청에 <문화방송>을 상대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및 신분을 이유로 행한 차별 등’을 수차례 진정했다.

이들은 2018년 <문화방송> 노사 협약에 따라 정년이 보장되는 ‘전문직’으로 전환됐지만, ‘무늬만 프리랜서’ 근무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최소 5년부터 최대 10년에 이르는 경력을 ‘후려치기’ 당한 셈이다. <문화방송> 쪽은 “직종과 고용형태 등이 워낙 각양각색이라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처우 개선을 단번에 이루기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국방송> <문화방송> 등 각 방송사의 ‘무늬만 프리랜서’들을 대리해온 문영섭 노무사(노무법인 로앤)는 <한겨레>에 “2007년 기간제법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방송업계에서 해당 법 적용을 사실상 회피하기 위해 ‘무늬만 프리랜서’(이른바 ‘상근 프리랜서’)를 전격적으로 도입했고, 이러한 행태가 현재는 공공연히 ‘관행’이라 불리며 업계로 새로 진입하는 청년들의 인식을 호도하고 있다”면서, “더 늦지 않은 시일 내에 청산을 위한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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