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문화一流] 손가락 마비에 失明.. 헨델은 고난 속에 완성한 '메시아'를 세상과 나눴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2021. 12.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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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서 '伊 오페라'로 성공한 獨음악가.. 평생 질시·공격에 시달려
손 마비된 52세, 종교 합창곡에 영어로 가사를 단 '메시아' 발표
수익은 모두 병원 등에 기부.. "신과 인간에 진정한 의무 다해"

어느덧 12월이다. 연말이 다가오면 자주 공연되는 음악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1685~1759)의 ‘메시아’다. 예수의 생애와 구원을 그린 이 작품은 계절적으로도 어울리지만, 음악적으로도 최고의 명작이다.

학교에서 우리는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고,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다”라고 들었다. 그래서 바흐나 헨델의 음악은 몰라도, 그들이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데 다만 비유일 뿐인데,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 선생님은 없었다. 그래서 부작용으로 헨델을 여자로 생각하는 아이가 생기는가 하면, 둘을 부부로 믿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 때문이다. 둘은 같은 독일 출신이자 동갑내기다. 음악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이후 고전음악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들이 활동한 지역과 분야는 판이하며, 그들은 서로 존중했지만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바흐는 평생 고향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궁정과 교회에 봉직하여 고용주가 요구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았다. 반면 헨델은 20대에 외국으로 나가 50년 가까이 영국에서 살았다. 그는 오페라 회사를 차려서 40편이 넘는 오페라를 쓰고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로 부귀와 명성을 누렸다.

이런 말을 하면 바흐는 소박하고 성실한 예술가 같고, 헨델은 화려한 사업가처럼 보인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바흐의 인기가 높아서 상대적으로 헨델에 대한 이해는 떨어진다. 적지 않은 사람이 헨델을 세속적인 성공을 좇아 그것을 얻고 누린 사람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그가 타국에서 이룬 것이 쉬운 것이었을까? 그의 초인적인 투쟁의 삶을 우리는 간과한다.

헨델의 주력 분야는 ‘이탈리아 오페라’로서, 이탈리아의 형식을 따르고, 이탈리아어로 공연되며, 내용은 주로 그리스와 로마 신화나 역사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이런 헨델의 오페라는 성공했지만, 영국의 것이 아니었기에 질시와 반발도 거셌다. 헨델은 영국으로 귀화했지만 여전히 차별도 심했다. 반대파는 그를 저지하려 이탈리아 본토의 작곡가를 데려오기도 하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영어로 부르는 ‘발라드 오페라’가 성행하기도 했다. 헨델이 성공을 거둘수록 반작용도 커졌고 헨델의 스트레스도 커져갔다.

공연의 압박과 막중한 업무 속에서 헨델은 결국 무너졌다. 52세에 마비가 온 것이다. 뇌졸중인지 확실하진 않으나 오른손 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그는 치료를 위해 온천물에 남보다 3배나 오래 들어가 있었으며, 오르간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 오른손을 재활하였다. 그러는 동안 헨델의 오페라는 점점 인기를 잃어갔다. 그러자 그는 연극적인 형태의 합창곡인 오라토리오에 영어로 가사를 붙여서 다시 도전했다. 그 시기에 쓴 오라토리오가 ‘메시아’다.

‘메시아’ 공연 때 객석의 왕이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중도 다 함께 일어서서 들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전설’일 뿐이다. 대신에 ‘메시아’에 대해 꼭 알아야 할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는데, 헨델이 한 푼의 수익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742년 더블린 ‘메시아’ 초연은 대성공을 거뒀지만, 헨델은 초연 수익에서 자신은 조금도 받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대신에 수익금은 수감자 구제 협회와 자선병원 두 곳에 3분의 1씩 배분했다. 다음 런던 ‘메시아’ 연주회는 더 큰 성공이었지만 이 수익금도 런던의 병원에 기부했다. 결론적으로 헨델은 자기 생애에 ‘메시아’를 통한 수익을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부분적으로나마 치유되어 다시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만으로 만족하고 신에게 감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헨델은 또다시 시련을 당하니, 점점 시력을 잃어가다가 완전히 실명한 것이다. 그래도 헨델은 매년 자선 공연을 벌였고, 은퇴한 음악가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선병원에 기부했다. 그는 실명과 뇌졸중에 우울증까지 겹쳤지만,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삶을 이어갔다. 그의 오라토리오 ‘삼손’을 공연할 때 “해도 달도 없다. 한낮의 불꽃은 어디 가고 어둠뿐이다”라는 장님 삼손의 노래가 울리자, 관객들은 오르간 앞에 앉아있던 눈먼 헨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치열하게 살아온 인간이 겸허하게 맞이하는 생의 마지막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늙은 헨델은 앞이 보이지 않는 몸으로 청중을 향해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헨델은 유언장을 집필했다. 평생 독신이어서 자손이 없었던 헨델은 적지 않은 재산을 모두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자신의 사후에 직원들과 하인들이 1년분의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고, 유품은 하인과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의 유일한 허영심은 감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고 싶다고 밝힌 것인데,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는 예수처럼 성(聖)금요일에 죽기를 소망했고, 금요일에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음 날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 한 전기는 “헨델은 신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의무감으로 온 세상에 완벽한 자선을 베풀며 선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고 썼으니, 그가 읽는다면 무척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헨델은 가장 큰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깊은 예술성과 높은 정신성을 담은 많은 음악이다. 그가 이룬 음악은 영국 음악의 기준이 되었다. 그 이후로 엘가와 브리튼 등 뛰어난 영국 작곡가들이 나왔지만,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그 누구도 헨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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