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정치가 여성을 소비하는 법
[경향신문]
평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사는 편이지만, 최근 정치권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보면 위치와 분야만 다를 뿐 여성을 향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적 시선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들이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남초 커뮤니티 글을 공유하고, 성폭력특별법에 무고죄를 신설하겠다고 공언하는 모습에 성평등 국가 실현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만 커진다. 선거 때만 되면 이미지 세탁을 위해 각 정당이 화려한 이력과 타이틀을 앞세워 영입 경쟁을 벌이는 모습도 진부하기 그지없지만, 그렇게 데려간 사람들을 소비하는 방식은 더욱 후진적이다. 특히 영입·동원되는 인사가 여성이면 그 증상이 더 뚜렷하다.
남성이라면 언급조차 되지 않을 외모와 관련한 소모적 논쟁은 여성에겐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거대 양당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된 여성들의 얼굴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려놓고 “차이는?”이라는 코멘트를 달아놓는 일이 집권여당 선대위 인사에 의해 버젓이 벌어진다. 외모 관련 댓글이 줄을 잇자 이 인사는 “내 눈에는 후보들의 지향가치 차이가 보인다”고 부연했다. 국민을 우롱하는 것인지, 노이즈 마케팅이나 해보겠다는 저급한 계산법인지는 알 수 없다. 전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해온 이들을 비교해 어떤 가치의 차이를 논하려는 것인지도 이해 불가다. 이에 질세라 방송에 나와 상대당의 여성 영입인사를 “예쁜 브로치” “액세서리”에 비유하며 왜곡된 성 인식을 당당히 드러낸 이도 있다. 156개국 중 102위(세계경제포럼 조사)로 여전히 하위권인 한국의 성평등 수준을 다시 한번 절감하는 계기다. “장신구는 여성만 다는 게 아니다”라는 해명에선 끝까지 내 생각은 잘못된 게 없다고 고집하는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이 보인다.
화려한 스펙으로 더불어민주당 선대위원장에 영입됐다 사생활 문제로 물러난 ‘조동연 사태’는 정치권이 여성의 이미지를 어떻게 소비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민간인이 10년 전 있었던 가정사까지 검증당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조씨가 맡았던 선대위원장직은 공당의 대선을 진두지휘하는 막중한 자리다. 또 선거 결과에 따라 추후 공직 후보자로 오를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민주당은 영입에 앞서 제대로 검증했어야 한다. 사적 영역에서 여러 일들이 있을 수야 있지만, 일반적인 윤리기준으로 논란이 적지 않을 사람을 선대위의 간판으로 내세우면서도 민주당은 ‘능력 있는 젊은 여성’ 이미지를 써먹는 데에만 급급했다. 정치적 계산을 앞세운 천박한 영입 방식이 불러온 인사 참사다. 젠더 정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으면서 이미지만 쓰고 버리는 정치권의 행태는 익숙할 정도로 많다. ‘여성인권 전문가’ ‘여성운동계의 대부’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영입해 놓고, 정작 권력형 성범죄에 침묵하고 성차별과 젠더 갈라치기를 오히려 부추기는 퇴행적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
조씨 사생활에 대한 공격 방식이 너무나 폭력적이란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검증, 아니 망신주기 차원을 넘어 인격살인, 가족에 대한 2차 가해 등 도를 넘는 공격은 가학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대선 후보 배우자를 두고 유흥업소 출신이네, 누구랑 동거를 했었네 등에 집중해 모욕을 주고 공격하던 양상과도 닮았다. 남성 중심의 정치권에서 여성 정치인이나 배우자 등에 대한 마녀사냥이 얼마나 일상화돼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별개 문제다. 검증 부실에서 비롯된 참사를 조씨를 희생양 삼아 물타기 하고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 역시 여성을 도구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선 후보 배우자들이 아이를 낳아 길러봤는지, 애완견만 키웠는지를 비교하며 국격 운운하는 장면에선 차마 눈을 뜰 수 없다. 난임 여성들이 겪는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도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여기는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에 절망감을 느낀다. 대통령의 배우자도 정부 예산과 인력이 지원되는 공적 자리인 만큼 도덕적·법률적으로 제기되는 의혹에 대한 엄격한 검증을 받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여성의 출산 여부가 평가 잣대가 되는 이 국격 떨어지는 현실은 대체 어찌해야 하나. 소속 의원들과 당협위원장의 배우자들로 배우자포럼을 구성해 선거 지원 활동을 벌인다는 당도 있다. ‘내조의 여왕’이라도 보여주겠다는 걸까. 구시대적 프레임에 갇힌 이들 앞에서 성평등을 부르짖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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