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보다 긴 하루 - 친기즈 아이뜨마또프 [채영신의 내 인생의 책 ①]

채영신 | 소설가 2021. 12. 5.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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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히기도 묻기도 힘든

[경향신문]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보았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하얀 배>를 재미있게 읽었던 중학생 때의 기억이 선뜻 이 책을 집어 들게 했다.

소설은 사로제끄 사막의 간이역에서 평생을 바친 노동자 까잔갑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그의 평생 동료이자 친구인 예지게이는 낙타와 트랙터, 굴착기, 개로 장례 행렬을 꾸려 길을 나선다. 그는 까잔갑을 아나-베이뜨 묘지에 묻고자 하지만 이미 그곳은 출입금지구역이 된 상태라 결국 나이만-아나가 거닐었던 땅에 장사 지내고 돌아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시신이 되어 땅에 묻히는 사람도, 그를 묻는 사람들도, 묘지를 막고 선 사람들도 모두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의 공포정치 속에서 고통받는 인물들이다.

이 피의 역사 속에 나이만-아나의 전설과 지구로의 귀환을 거부당하는 우주비행사의 이야기들을 얽어 작가는 까잔갑을 땅에 묻는 그 하루가 왜 백년보다 길 수밖에 없는지를 담담하면서도 촘촘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긴 하루는 허기진 암여우의 시선에서 시작되어 흰꼬리독수리의 시선에서 마무리되는데, 인간 세상을 동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 처절함이 배가된다.

소설은 긴 분량인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기에 그 마음을 감춰야 했던 예지게이가 수컷 낙타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욕망을 분출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만꾸루뜨(포로로 잡혀 암낙타 가죽을 머리에 쓴 노예)가 된 아들이 쏜 화살에 맞아 흰 새가 된 나이만-아나의 전설은, 포로의 머리에 씌워 만꾸루뜨를 만들어냈다는 낙타 생가죽 ‘시리’처럼, 삼십년 동안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을 정도로 묘사가 치밀하고 아름답다.

채영신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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