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영장 0건에 '아마추어론'까지..위기의 공수처

하준호 입력 2021. 12. 5. 18:42 수정 2021. 12. 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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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출범 319일째인 5일 현재 법원으로부터 피의자 구속을 위한 영장을 발부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 손준성 대구고검 인권보호관(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을 구속하고자 애를 썼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지난 10월 20일 체포영장에 이어 지난 10월 23일과 지난달 30일 두 차례에 걸쳐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도 번번이 막혔다. 모두 “구속의 필요성·상당성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공수처는 손 검사로부터 고발장 작성과 관련 자료 수집을 지시받은 검찰 관계자의 이름을 여전히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두 개의 다른 영장에 사실상 같은 내용의 범죄사실을 기재해 구속 사유를 소명하지 못했다. 수사를 통해 새롭게 수집한 유의미한 증거나 진술이 없는데도 인신 구속 시도를 되풀이하면서 “방어권의 형해화를 넘어 보복성 인신 구속을 강행하려 하는 불법적·반인권적 수사”(손 검사 측 변호인)란 반발을 샀다. 이후 공수처는 손 검사를 ‘고발 사주’와 별건인 판사사찰 문건 작성 의혹의 피의자 신분으로 6일 출석해 조사를 받으라고 요구했고, 손 검사 측은 재차 일정 조율을 요청하는 등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장이 지난 3일 정부과천청사 내 공수처로 출근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날 0시 20분쯤 '고발 사주' 의혹 핵심 피의자인 손준성 대구고검 인권보호관(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에 대해 공수처가 재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뉴스1


위법한 법 집행에 “인권 친화적 수사기구 맞나”


앞서 발부받은 영장에 따라 집행한 압수수색이 취소되는 수모도 겪었다. 같은 ‘고발 사주’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손 검사로부터 고발장 등을 전달받아 소속 정당(국민의힘)에 넘겼다고 의심받는 김웅 의원에 대해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 등을 지난 9월 10일, 13일 압수수색했지만, 김 의원 측의 준항고 끝에 법원은 지난달 26일 해당 압수수색 자체를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혐의 소명 없는 구속 시도, 적법하지 못한 법 집행 절차로 ‘인권 친화적 수사기구’란 수식어가 무색해졌단 평가도 나온다.

2000건이 넘는 고소·고발 사건 중 유독 특정 시민단체가 특정인을 겨냥해 고발한 사건만 집중적으로 입건해 수사한다는 정치적 편향성 지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날 현재 입건된 사건 23건 중 친여(親與) 성향의 사법정의바로세우기시민행동(사세행)이 고발해 입건된 사건만 최소 5건에 이른다. ▶이성윤 서울고검장 공소장 유출 ▶옵티머스 펀드사기 사건 부실 수사 ▶판사사찰 문건 작성 ▶한명숙 전 국무총리 모해위증교사 의혹 수사 방해 ▶‘고발 사주’ 의혹 등이다. 이 중 이 고검장 관련 사건만 빼면 모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정조준하는 사건들이다.

반면, 검찰이 상당 부분 수사를 진행한 뒤 피의자의 고위공직자범죄 혐의를 발견해 공수처에 이첩한 사건 수사는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서울중앙지검이 지난 3월 17일 이첩한 이규원 대전지검 부부장검사(전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 검사)의 ‘윤중천·박관천 면담보고서’ 허위 작성·유포 및 이광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공모에 따른 기획 사정(司正) 의혹 수사는 지난 7월 이후 멈춰 있다. 수원지검이 지난 5월 이성윤 고검장을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사건 수사외압 혐의로 기소한 뒤 이첩한 나머지 피의자에 대한 수사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모두 현 여권에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사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주요 수사 사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공수처 2인자마저 “우리는 아마추어인데…”


공수처는 검찰권을 견제하기 위해 탄생한 탓에 필연적으로 검사를 피의자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런 검사들과 법리 다툼에서 연달아 패하는 것도 공수처의 문제점으로 꼽힌다. 지난 3월 김학의 불법 출금 의혹 사건을 이첩받은 뒤 다시 수원지검에 돌려주며 “수사 후 송치하라”고 요구한 ‘유보부 이첩’은 법원이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여운국 공수처 차장이 지난 2일 손 검사에 대한 구속영장실질심사에 직접 출석해 “우리는 아마추어”라는 취지로 말한 걸 두고 한 법조인은 “검찰을 견제할 능력이 없다고 자인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여 차장은 영장 심사 당시 “고발 사주가 대장동 수사보다 훨씬 중대한 범행”이라고 판사에 호소해 또 다른 논란을 낳기도 했다.

법조계에선 태생부터 제1야당을 배제한 채 범여(汎與) 단독으로 출범한 공수처의 한계란 지적이 나온다. 정치적 합의에 따른 산물이 아닌 만큼 국민의 신뢰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법조계 인사는 “출범 1년이 다 돼 가도록 공수처가 존재 이유를 보여주지 못하면 대선을 앞두고 존폐론이 확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출범 약 1년이란 시간은 신생 기관이 안착하기엔 충분치 않다는 견해도 있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법무정책연구실장은 “형사사법기관이 조직되고 역할을 하는 데는 적어도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이 필요하다”며 “공수처가 지속해서 조직을 정비하고 인원을 충원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는 가운데 신뢰를 쌓아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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