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죽음 좇다 심연 속에 심장박동 남기고 떠났다

이한나 2021. 12. 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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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과 그 친구들' 3번째 시리즈
'크리스티앙 볼탕스키:4.4'
회고전 준비하다 작가 사망해
세계 최초 유고전 한국서 열려
내년 3월 27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유고전 전경 -심장-그동안 [사진 제공 = 부산시립미술관]
'쿵쾅 쿵쾅 쿵쾅····.'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에 이끌려 전시장에 입장하니 어두컴컴한 벽 양쪽에 불규칙한 형태의 검은 아크릴 판들이 가득했다. 천장 가운데 달린 전구 하나의 빛이 내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니 내가 마치 그 공간 속 일부가 된 것만 같다. 고인이 된 작가가 남긴 '생명의 소리'인 심장박동이 주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내 존재를 새삼 되돌아본다. 한국 단색화 열풍을 선도하는 작가 이우환도 일본 데시마에서 이 작가의 '심장소리' 프로젝트를 접하고 깊은 울림을 받았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유고전 전경-심장-그동안 [사진 제공 = 부산시립미술관]
올 여름 타계한 프랑스의 대표적 현대예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2005년 작품 '심장'은 2010년 작품 '그 동안'과 바로 연결돼 작가를, 그가 대표하는 인간의 삶을 되짚어보게 한다. 이 작품은 전시실을 나누는 흰 실로 된 커튼에 7세부터 65세 사이의 작가 모습을 투영해 준다. 소년에서 노인까지 이어지는 모습은 다양한 연령대 관람객들이 공감하며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을 평소 두려워했다는 작가는 일단은 성공한 듯 싶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이우환과 그 친구들' 시리즈의 3번째 전시로 기획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전이 미술계에서 화제다. 국내 최대 규모 회고전으로 준비되던 전시가 첫번째 유고전이 됐기 때문이다. 올해 10월 15일 개막한 이번 전시는 볼탕스키가 작품 선정과 공간구성, 전시 디자인까지 완성한 상태로 지난 7월 14일 타계했다. 전시 기획에 관여했던 이우환이 볼탕스키와 대담하기 위해 출국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이우환은 예정대로 출국해 장례식에 참석한 후 프랑스에 체류중이다. 프랑스에서 온 그의 스튜디오 설치팀은 작가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참아가며 전시를 준비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유고전 전경-인간(위)-탄광(아래) [사진 제공 = 부산시립미술관]
양은진 학예연구사는 "전시 제목 4.4는 작가가 태어난 해(1944년)를 의미하는데, 작가가 한국에서 숫자 4가 '死(죽을 사)'와 발음이 같아 죽음을 뜻하는 것을 알고, 본인 인생의 4단계 중 마지막 단계라는 의미에서 마침표와 함께 직접 정했다"고 설명했다.

전세계적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일상에서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게 된 현 상황에 대해 작가는 "죽음은 현재"라고 말해 왔다. 유대인 의사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간접 경험한 대량 학살이나 집단적 죽음을 초기에 다루다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등으로 확장해 평생 탐구해 왔다.

2. 기념비(Monument, M002TER), 1986, 금속 프레임, 전구, 300 x 127 cm, 작가 소장
이번 전시는 초기작부터 올해 작품까지 총 43점으로 구성됐다. 특히 전시장에 걸린 전구작품 '출발(depart)'과 '도착(Arivee)'은 한글을 전달받아 작가가 직접 디자인했고, 별관(이우환 공간) 벽에 불어 'Apres(그 후)'로 마무리된다.

전시장 초입에는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준 1986년작 'Monument(기념비)' 연작이 나온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어린이 사진으로 종종 오해되지만, 이 작품은 어른이 되기 위해 우리 안의 어린이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았단다. 수집된 사진을 재촬영해 가공한 인물들이 작은 백열등과 주석 액자틀에 담겨 새로운 의미를 내뿜는다.

또 다른 유명작 '그림자 연극'은 인간이나 해골 형상을 허접한 종이로 인형극처럼 만들고 빛을 비춰 그림자를 만들고 바람으로 움직임을 주는 방식으로 재연됐다. 무서운 환영을 만들어내는 형상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나 인간 삶의 실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가장 초기작인 1969년 아방가르드 단편영화 '기침하는 남자' 영상 속 좁은 방안에서 탈을 쓰고 기침하며 각혈하는 인물 모습이 지금 봐도 충격적이고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다.

8. 아니미타스(Animitas Chill), 2014, 영상, 건초, 말린 꽃, 가변크기, 작가 소장
1988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유대인 학살과 연관된 작품 'Reserve Canada(저장소: 카나다)'를 처음 선보이며 그의 작업에서 옷이 사진만큼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게 됐다. 수북히 걸린 헌옷들 더미는 인간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번 전시를 위해 부산 국제시장 상인들이 도와 헌옷 2톤(t)을 모았다.

'Coat(코트)'라는 작품도 푸른색 전구로 옷 모양을 둘러싸는 '부재'를 상징한다. 지푸라기 2톤(t)위에 번쩍이는 응급담요를 덮고 천장에 달린 전구 하나가 진자 운동처럼 움직이는 작품 'Mer Doree(황금 바다)'은 유대인 학살후 금니가 쌓인 모습같기도 하다.

9. 잠재의식(Subliminal), 2020, 영상, 가변크기, 작가 소장
2020년 작품 '잠재 의식'은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베트남전쟁 등 20세기 잔혹사를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던진다. 볼탕스키가 작업을 위해 수집해온 범죄 관련 잡지의 이미지와 다양한 사진 기록들이 작품으로 변화된 것도 흥미롭다.

마지막 별관에서 보는 2021년 작품 '설국'은 하얀 천들이 겹겹이 뒤엉켜 산처럼 쌓여 있고 핏줄이나 혈관처럼 길게 늘어뜨려진 천장의 하얀 LED 조명이 코로나 시대 병상의 침대 시트를 연상시킨다. 2015년작 '황혼'에서는 어두운 방 바닥에 전시 기간을 상징하는 165개의 전구가 깔려 있고 매일 하나씩 꺼지게 설정돼 마지막날 암전된다. 지나가는 시간과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작가가 환기시킨다.

기혜경 관장은 "작가의 갑작스런 타계로 여러 전시가 취소됐지만 이번 회고전은 어렵게 성사됐다"며 "작가가 평생 이야기해온, 현재화된 죽음의 의미와 기억의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할 것"이라고 했다.

내년 3월 24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일부러 관람객들의 자유로운 감상 혹은 명상을 열어두기 위해 전시장 안에 작품명을 달지 않았다. 전시소개 책자를 들고 찬찬히 작가의 궤적을 따라가보면 된다.

[부산 =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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