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공습 80주년..한국군 명심해야 할 美·日의 2가지 실수

이철재 입력 2021. 12. 5. 05:00 수정 2021. 12. 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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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현지시간) 필리핀해에서 열린 연례 다국적 연합 해상훈련인 애뉴얼엑스(ANNUALEX)가 끝났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주관하는 이 훈련엔 미국ㆍ호주ㆍ캐나다ㆍ독일 해군이 참가했다. 미 해군은 핵추진 항공모함인 칼빈슨함(CVN 70)까지 동원했다.

미국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함(뒤쪽)과 일본 해상자위대 헬기 호위함인 이즈모함이 나란히 항해하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


이처럼 미국과 일본은 최근 연합훈련을 자주 벌인다. 해상과 공중은 물론 상륙훈련까지 함께 한다.

인도ㆍ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제1 군사 동맹국은 원래 한국이었다. 하지만, 요즘 미군 해외 뉴스에선 일본과의 연합훈련만 나온다. 인ㆍ태 지역에서 미국의 최대 위협이 북한이 아닌 중국으로 바뀌면서 일본의 역할이 더 커진 탓이다. 북한의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한ㆍ미 연합훈련을 소규모(대대급 이하)로 진행하고 있는 영향이기도 하다.

찰떡궁합의 미ㆍ일 관계를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5월 28일 전용 헬기 마린 원을 타고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스카(橫須賀) 기지에 정박한 일본 해상자위대 가가(加賀)에 갔다.

2019년 5월 8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부부와 함께 일본 해상자위대 헬기 호위함인 가가함에 올라 미일 해군 장병의 환영을 받고 있다. 연합=AFP


가가는 헬기 호위함이다. 넓은 갑판을 갖춰 항공모함으로 쓸 수 있다. 일본은 2018년 가가를 경항모로 개조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를 옆에 세우고 “미ㆍ일 동맹은 전례 없이 강해졌고, 우리가 가가에 함께 서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목청을 높였다. 가가함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 500여 명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에 손뼉을 치며 환성을 질렀다.


80년 전 악연의 배에 오른 트럼프

그런데 가가함은 미국과 악연이 있는 배다. 현재 경항모 개조를 앞둔 가가함은 2대 가가함이다. 1대 가가함은 일본 제국주의 해군의 항모였다. 그리고 80년 전인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공격할 때 선봉에 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 공습으로 불타고 있는 미국 해군의 전함들. National Archives


진주만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이 태평양의 핵심 기지로 만들었다. 본토 서쪽인 캘리포니아에 있던 함대를 하와이까지 끌어왔다. 당시 주적인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 눈엣가시와 같은 진주만을 먼저 치려고 했다. 미국이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주에 맞서 석유와 철강 수출 금지 카드를 꺼내 들자, 일본은 개전을 결심했다. 석유와 철강은 일본에 필수적인 전략물자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공격에 미 해군 전투함 12척이 침몰하거나 손해를 입었고, 미 육군과 해군의 군용기 188대가 부서졌다. 군인 2335명과 민간인 68명이 숨졌다. 물질적 피해보다는 심리적 충격이 더 컸다. 진주만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미국은 ‘진주만을 기억하자(Remember Pearl Harbor)’라는 구호로 국민의 전의를 북돋웠다.


일본의 빈집털이 기습에 당한 미국

2019년 개봉한 영화 ‘미드웨이’에서 나온 것처럼 미국은 그냥 앉아서 당했다. 빈집털기와 다름없었다. 공격 날은 일요일이었다. 하와이를 지키는 미 육군과 해군은 일부 인원만 빼고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영화 '미드웨이'에서 진주만 공격 장면. 라이온스게이트


일본은 미국에 선전포고하기 전에 공격했다. 일본은 공습이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선전포고문을 미국에 전달했다. 당시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 본국에서 온 암호 전문을 해독하고 이를 타이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었다.

12월 7일 오전 6시. 가가를 포함한 6척의 항모에서 제1차 공격대 183대가 이륙했다. 미군은 처음엔 훈련인 줄 알았다. 미 육군은 해군이, 미 해군은 육군이 통보 없이 훈련하는 것으로 서로 생각했다. 그래서 ‘진주만이 공습당했다, 이건 훈련이 아니다’는 긴급 교신이 나오기도 했다.

미군은 하와이 인구의 30%였던 일본계 이민자들을 우려해 군용기를 격납고에서 꺼내 비행장 한가운데 모아뒀다. 지키기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일본의 좋은 먹잇감이 돼버렸다.

제2차 공격대 167대가 뒤이어 진주만을 폭격했다. 이번엔 미군은 반격했다. 군용기와 전투함은 기지에서 벗어났다. 일본 공격대의 피해도 있었다.


보신주의 지휘관을 뽑은 일본 해군 지휘부

야마구치 다몬(山口多聞) 소장 등 지휘관과 참모, 조종사들이 진주만 공격부대 사령관인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중장에게 3차 공격을 건의했다. 일본은 3차 공격으로 진주만의 해군 수리 시설과 유류 저장고를 파괴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구모 중장은 철수를 명령했다.

1940년 10월 30일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 기지 항공촬영 사진. 미 해군


나구모의 논리는 이러했다. 전과는 충분히 거뒀고, 진주만에서 발견하지 못한 미국의 항모가 반격할 수 있었다. 1차 공격 후 미국의 방어도 매서워졌다.

사실 나구모는 출동 전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해군 군령부총장(해군 참모총장)으로부터 ‘함대를 최대한 보존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엄청난 생산력을 가진 미국과 전쟁을 치르려면 일본은 배를 더 만드는 것 못잖게 배를 잃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했다.

또 일본이 3차 공격을 했더라도 미국의 능력이라면 수리 시설과 유류 저장고를 금방 복구했을 것이다.

문제는 나구모의 소극적 지휘였다. 김진형 전 2함대 사령관(예비역 해군 소장)은 “전쟁은 작전계획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전황은 늘 유동적이기 때문”이라며 “상부의 지침이 있더라도 장수라면 전기를 놓치지 않고 전과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구모는 1942년 6월 4~7일 태평양 한가운데 미드웨이에서도 우물쭈물하다 오판을 내렸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모 4척과 정예 조종사 수백명을 잃었다. 이후 일본은 내리 패전의 길을 걸었다.

항공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구모를 항공함대(항모 기동부대) 지휘관으로 앉힌 일본 해군 지휘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나구모는 수뢰전 전문가다. 연공서열로 항공함대 지휘관이 된 것이다. 그보다 짬밥이 낮은 야마구치가 항공전 전문가였다.

옛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낸 최종호 조이앤파트너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일본 해군은 ‘해먹넘버’라는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 졸업 성적과 연공서열을 바탕으로 한 인사를 했다. 이런 인사 시스템 아래에서 실력 있는 지휘관이 발탁되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최종호 변호사는 “한국군 인사 제도도 일본 제국주의 해군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에 지역안배, 출신안배라는 요소가 더해졌을 뿐”이라며 “한국군에도 나구모와 같은 지휘관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나”고 되물었다.


설마하는 방심에 일본 항모 행방 놓쳐

사실 미국은 일본 공격에 대한 사전 징후를 포착했다. 일본 해군은 6개월마다 바꾸던 함대 호출부호를 한 달 만인 41년 12월 1일 전부 교체했다. 일본 해군의 핵심인 제1,2 항공전대(항모 전투단)이 갑자기 사라졌다.

일본 제국주의 해군 항모 가가함. 1935년 순향전함에서 항모로 고쳐졌고, 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몰했다.


공격 이틀 전인 12월 5일 미 해군의 구축함이 진주만 가까운 바다에서 일본의 잠수정을 격침했다. 공격 당일엔 미 육군의 레이더가 일본 공격대를 발견했다. 하지만, 미군 지휘부는 초임 구축함 함장의 보고를 믿을 수 없으며, 미 본토에서 날아오는 B-17 폭격기 편대라고 생각했다.

일본이 항모를 이끌고 진주만을 폭격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해 전인 40년 11월 11일 영국이 항모로 이탈리아 해군의 모항인 타란토를 습격했다. 그러나, 진주만은 일본에서 먼 거리에 있었고, 방어망도 더 튼튼했다.

진주만 공격 때 침몰한 미국 해군의 전함 애리조나함 위에 만든 애리조나함 기념관. 기념관 벽에 애리조나함 1177명의 장병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진주만 수심은 얕다. USGS


진주만의 바다(수심 12m)는 얕아서 전투함을 가라앉힐 항공 어뢰가 개펄에 처박힌다고 미국은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어뢰 꼬리에 나무 날개를 달았다. 이러면 어뢰가 10m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황인종 국가인 일본을 깔보는 미국의 인종적 편견도 작용했다.

최종호 변호사는 “작전 분야에서 큰 지휘관은 작전계획에 부정적인 정보를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상황에 맞는 정보를 직접 수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종호 변호사는 “일본 해군은 작전을 우선으로 하고 정보와 군수 같은 분야를 부차적이라 생각했다. 이런 성향은 한국군도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가가함에 얽힌 미ㆍ일 관계는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진주만 공격은 한국에게 큰 교훈을 준다. 당시 미국과 일본이 저지른 실수는 한국군이 반드시 명심해서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한국군의 특성상 따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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