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흥분하라, 디자인씽킹하라" 피터 슈라이어의 혁신 노트

"리스크 감수 안하면 더 큰 리스크 초래"
"한국 수소차, 전기차 분야에서 세계 선두"
"직선의 단순함.. 리더는 명확한 디자인씽킹해야"
"브랜딩 핵심은 디자인..정의선 회장이 큰 힘"
"첨단화될수록 촉각 중요해"

피터 슈라이어 현대차그룹 디자인경영 사장. 그가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궤적을 담은 섬세한 회고록 '디자인 너머'를 출간했다./사진=고운호 기자

피터 슈라이어는 가회동의 현대디자인라이브러리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다. 중정이 딸린 작지만 매력적인 공간에서 최근 발간된 그의 책 ‘디자인 너머’ 전시가 열리고 있다. 늘 그렇듯 검은 옷에 검은 안경을 쓰고 밝게 웃으며 곁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샤프펜슬로 즉흥적인 스케치를 만들어낸다. 마치 손끝에 뇌가 달린 것 같다.

지난 2006년부터 현대자동차 그룹에 조인한 이 자동차 디자인계의 거장은 유명한 호랑이코 그릴과 ‘K시리즈’ 등 히트작을 내며 세계 시장에서 기아의 위상을 단번에 끌어올렸다. 동시에 피터 슈라이어의 명성도 확고해졌다. 아우디와 폭스바겐에서 TT, A3, A6, 뉴비틀, 골프4 등의 유려한 디자인을 만들어냈던 유럽인의 감성이 기아와 현대차에 융합되는 과정은 경이롭다.

2018년부터 현대 자동차 그룹의 디자인 경영 사장으로 활약하는 피터 슈라이더를 만나 혁신의 힌트를 들었다. 중요한 대화의 마디마다 정의선 회장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마치 인터뷰 테이블에 정회장이 동행한 듯한 기분이었다.

취향과 비전이 같은 두 사람의 격의없는 협업이 이 몸집 큰 제조업을 빠르고 진취적인 미래 산업으로 탈바꿈시킨 주요 엔진인 듯 했다.

정 회장은 음악을 좋아하는 피터 슈라이어에게 ‘우리의 영웅, 영원히’라고 새긴 베이스 기타를 선물했다. 슈라이어는 그 기타를 ‘인생의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책임의 규모가 큰 대기업임에도 스타트업 동료같은 따스한 우정이 경영진의 핵심 정서라는 게 놀라웠다.

피터 슈라이어는 1978년 아우디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40년이 넘도록 자동차업계에서 일한 장인 디자이너다./사진=고운호 기자

-한국은 대중문화도 자동차 문화도 후발 주자이지만, 기존 산업을 토대로 특유의 ‘자기다움’을 잘 섞어서 지금 세기에 특별히 더 주목받고 있습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당신도 한국 문화의 혜택을 받았다고 느낍니까?

“그럼요. 처음 한국에 올 때부터 환대받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한국 사람의 특유의 다정한 북적거림이 좋았어요. 한국인들이 즐기는 예술, 건축, 음식, 길거리 패스트푸드까지 전부... 저는 한국 문화에 조금씩 스며들어 갔어요. 정말 흥미로운 건, 한국이 전통을 보존한 채로 첨단 기술을 융합하는 방식이었어요.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저는 공간에 매우 예민한데, 서울이라는 도시는 융합이 일상화되어 있어요. 예컨대 현대식 건물 안에 격식을 갖춘 한정식집이 있고, 주문은 아이패드로 받는 식이죠. 그런 일상의 어우러짐에서 제가 받는 영감이 커요. 그래서 우리 제품이 다 모습이 다르고 유니크해요.”

그는 기아 현대차를 우리 제품이라고 표현했다. ‘이질적인 문화를 포용하는 그런 ‘유니크한 조합’이 유럽 시장에서 우리 차의 경쟁력’이라고. 애초에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철학, 두 개의 스타일을 끌어안는 ‘포용의 총량’이 미묘한 디테일을 만들어낸다.

-이번 책 ‘디자인 너머’의 원제인 ‘뿌리와 날개’가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저한테는 시각보다 촉각적인 자극으로 오더군요. 당신의 뿌리는 독일 바이에른의 할아버지 공방에서 시작했지만, 당신의 날개는 한국의 기아와 현대에서 자랐죠.

“맞습니다. 저의 뿌리는 어릴 때 뛰놀던 시골의 자연환경에서 시작됐어요. 연장이 가득했던 바이에른의 할아버지 공방에서 싹이 텄고, 아우디와 폭스바겐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크게 성장했죠. 독일의 가족과 친구들도 저를 지탱하는 뿌리였어요. 뿌리가 튼튼해야 멀리 날 수 있습니다(웃음).

현대는 제가 마음껏 날아오르도록 허용해줬어요. 정의선 회장은 나를 박스에 가둬 넣지 않고, 내가 하는 방식대로 해보라고 부추겼죠. 물론 설득은 필수였지만, 우리는 ‘케미’가 맞았어요. 그는 내게 힘과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BMW F2를 기반으로 피터가 십대 시절에 만든 모델./사진제공=윌북

-등에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느낌이 어떻던가요?

“(미소지으며)신나죠. 저는 젊은 시절부터 그런 비상한 움직임을 즐겼어요. 스켈레톤과 비행기 조종을 좋아했죠. 미니멀한 썰매를 타고 엄청난 가속도로 하강할 땐 마치 땅을 날아가는 느낌이에요. 방향을 회전하는 순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죠.

비행도 마찬가지예요. 몸이 위로 떠오르는 것만으로 일상의 고민을 잊을 수 있어요. 산 옆으로 날 수도 있고 직접 조종해서 아름다운 것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죠. 직접 기계를 다루고 싶은 욕망, 기술에 대한 탐구가 제 안에 오래도록 꿈틀댔어요.”

-마치 자동차 디자이너로 디자인된 몸을 갖고 태어난 것 같군요!

“맞습니다. 항상 스케치를 했고, 페인팅을 했고, 무엇이든 만드는 걸 좋아했죠. 동시에 비행기와 자동차의 동체에 탐닉했습니다. 아버지가 운전을 가르쳐주셨어요. 코너링, 드리프트… 그런 모든 요소가 육체에 쌓이고 디자인 커리어로 빌드업 돼서, 한국에 왔을 때 날개를 달고 날 수 있었죠(웃음).”

-수시로 연필을 사용하는 이유가 손끝의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가요? 디자이너는 좋은 공간, 좋은 디자인을 눈보다는 피부로 느낀다고 알고 있어요.

“연필의 감각은 제게 매우 중요해요. 끄적끄적 어떤 형태가 나올 지 모르는 채로 하는, 그런 스케치를 좋아합니다. 컴퓨터는 완성을 지향하는 기계예요. 빠르고 첨단이고 다른 디자이너와의 협업할 때 필수적이지만, 혁신은 손끝에서 나와요. 지금도 저는 손으로 만지면서 작업하는 걸 좋아합니다. 머리에 떠오른 심상을 즉석에서 한 장의 종이에 꺼내놓죠.”

피터 슈라이어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기록한 책 '디자인 너머'는 출간되자마자 예술분야 베스트셀러로 진입하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말씀하셨듯이 눈으로 보는 디지털 경험과 달리 직접 경험은 몸에 닿는 촉각의 세계죠. 자동차는 우리를 직접 경험의 세계으로 이끌어내고 있는 최전선의 모빌리니티라는 점에서 몸의 상상력, 촉각의 감각을 구현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잠잠히 생각하다)그래서 저는 해질녘에 불을 끄고 차를 비춰보는 걸 좋아합니다. 커다란 거울에 바퀴를 달아 자동차 주위를 움직일 수 있게 해뒀죠. 해가 지면 조명이 달라지고 도시마다 드라이빙 경험이 달라지니 그 변화를 상상해봐요. 개인적으로 터치스크린보다 버튼 조작을 좋아해요.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몸의 움직임이 느껴지도록 디자인하려고 하죠.”

-디자인 뿐만 아니라 일할 때도 상호작용의 감각을 중요시 한다고 들었어요. 팀을 꾸리면 가장 먼저 함께 오디오와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러 간다고요.

“하하. 일터에서 나누는 우정과 경험을 놓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보고 들어야 새로운 게 나오죠. 팀은 재즈밴드나 축구팀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섞여서 아이디어를 내고, 패스를 주고받고 즉흥 연주하듯 발전시키는 겁니다.”

-당신 취향 안에도 여러 예술가 동료들이 공존하더군요. 마일드 데이비스, 사이 트윔블리, 봉준호, 서도호… 예술가로서의 피터와 산업 디자이너로서의 피터가 충돌하진 않습니까?

“예술과 디자인이 다른 영역인 건 맞습니다. 디자이너는 솔루션을 찾고 아티스트는 질문을 던지죠. 아티스트는 도발을 해요. 그래서 디자이너는 연구해야죠. 다른 예술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과물을 내놓는지. 저는 마일드 데이비스의 음악에서 디자인 영감을 많이 받아요. 그의 음악은 재즈를 발명한 느낌을 줍니다. 재즈와 펑크를 섞는다든지, 여러 장르를 섞어서 뉴스타일을 만들어 내요.”

-아티스트가 융합의 모델이군요!

“그렇죠. 사이 트윔블리의 그림은 생각과 감정의 융합이에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우리 아이가 해도 저 낙서만큼은 하지”라고 해요. 그럼 저는 “해보라!”고 합니다. 대기업에서 타부서 사람들이 디자이너에게 종종 하는 말이 그거예요(웃음). 잘 모르면 쉽게 보이는 법이죠. 사이 트윔블리는 언어를 페인팅으로 보여줬어요. 어디로 갈 지, 자기 생각의 길을 개척했죠.”

-당신이 제시한 기아의 ‘직선의 단순함’도 그렇게 나왔나요? 종이 위에 그린 선 한 줄이지만, 혁신의 가이드라인이 됐잖아요.

“그렇습니다. ‘직선의 단순함’은 디자인 레시피가 아니라 철학,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고객과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정직하게 직관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방향이죠! 정의선 회장이 이런 추상적인 철학을 이해해줬어요. "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인 명장에게서 가장 많이 발화된 첫번째 단어는 ‘융합’ 그 다음이 ‘정의선’이었다. 정의선은 그에게 융합과 동의어 혹은 융합의 강력한 촉매제처럼 보였다.

정의선 회장이 피터 슈라이어에게 선물한 기타./사진=윌북 제공

피터 슈라이어는 책에서 디자이너가 경영자의 노리개가 되어서는 안 되며, 기업에서 더 승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했다.

패션계를 제외하면, 얼마나 많은 디자이너들이 오너의 비위를 맞추면서 재능을 낭비하고, 승진에서 낭패를 겪는지 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기업의 비전을 소비자와 구성원들에게 시각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 임원의 역할은 커지고 있다.

-정의선 회장과 당신은 어떤 점이 닮았나요?

“(오래 생각하다)딱 짚어 얘기하긴 곤란해요.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이해했어요. 상호신뢰였죠. 저는 최선을 다해 설득했고 그는 허용했습니다. 운좋게도 좋은 시기에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에서 만났기 때문이죠.”

-양쪽 다 큰 리스크가 될 수도 있었어요.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리스크다. 기업 입장에서도 리스크지만, 저도 책임이 커지는 거라 큰 도전이었죠. 모든 게 한 통화의 전화에서 시작됐어요.”

15년 전, 그 날의 전화 얘기를 할 때 슈라이어의 이마에 환한 전구가 켜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해요. 2006년 1월 17일이었어요. 독일에서 스위스로 가던 중이었는데, 머릿속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났죠. 지구 정 반대의 곳에서 나를 부른다고? 가본 적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게 저를 흥분시켰어요.

일을 시작할 때 흥분감이 중요해요. 뭔가 할 수 있겠다, 멋진 차를 만들 수 있겠다… 기아는 제게 빈 캔버스였죠. 처음 왔을 때부터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예술가인 동시에 기술을 이해하는 탁월한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어./사진=고운호 기자

-그게 뭐죠?

“회사의 문화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회사 문화가 완전히 바뀌리라고는 저도 상상을 못했어요. 많은 디자이너들이 제게 메일을 보내요. 강력한 동기부여, 격의 없이 어울리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고요.”

어쩌면 자동차 디자인에 앞서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 일하는 방식을 디자인했다는 데 슈라이어의 탁월함이 있다.

예컨데 2013년부터 현대차그룹 디자인 전체를 총괄하면서 그는 현대와 기아차의 정체성을 조약돌과 당구공으로 이미지화했다.

-현대를 조약돌에 기아를 당구공에 비유한 ‘정체성 선언’은 어떻게 나왔죠?

“정의선과 대화하다가 나왔어요. 회장님이 먼저 꺼냈는지, 내가 먼저 질문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현대는 물방울의 생명감이 있고 기아는 눈결정체같은 구조적인 면이 있다고 했어요. 거기서 두 기업의 정체성이 분명해졌죠. 현대차는 조약돌처럼 통일감이 있지만,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어요. 반면 기아는 사람이 만든 정확성과 정교함이 두드러지죠. 그 차이를 선언문으로 만들어서 구성원들과 공유했어요.”

조약돌은 현대차 당구공은 기아차./사진제공=윌북

-브랜드의 시작은 항상 디자인인가요?

“그렇죠. 그걸 저는 아우디에서 배웠고 폭스바겐에서 배웠어요. 그 당시 아우디는 좋은 차였지만 중립적이었고 개성이 없었죠. 정체성이 없으면 바깥 세상에 나갔을 때 묻혀요. 눈에 띄지 않죠. 뚜렷한 특징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TT는 아우디의 이미지를 단번에 바꿨어요. 기아도 디자인 혁신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시장에 어필할 수 있었지요.”

-K5가 디자인 상을 휩쓸기 전에 최초로 레드닷어워드에서 수상한 차량은 쏘울입니다. 쏘울은 이름 자체가 혁신적이었어요.

“쏘울은 기존 차와는 다른 엉뚱한 면이 있는 콘셉트 카였는데, 정의선 회장이 생산을 승인했어요. 이름도 처음엔 부정적이었어요. 음악 장르같다, 불어로 취했다는 뜻이다 등등. 저는 이 이름을 지지했고, 최종적으로 결정됐어요. 차 이름은 회사의 운명과 같이 가요. 그후 쏘울은 기아의 쏘울이 됐습니다.”

-혁신의 와중에 난관은 없었나요?

“(미소지으며)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은 늘 어렵습니다. 의사결정할 때 늘 부담을 느껴요. 가령 3개의 디자인팀이 경쟁을 했다면, 선정되지 않은 나머지 팀에게 결과를 통보하는 게 어려워요. 안좋았던 게 아니라, 더 적합한 게 있었을 뿐이니까. 실패한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함께 먹는 한국의 '회식' 문화에 호감을 갖고 있다./사진=고운호 기자

-요즘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습니까?

“탈 것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어요. 소유 차량과 공유 차량, 다양한 모빌리티의 니즈를 보고 있어요. ‘도시인이 꼭 자가용을 소유해야할까’하는 질문도 하면서요.”

-미래를 내다보고 현재의 시스템을 재조정하는 건 기업 입장에서 큰 도전입니다. 가솔린 엔진 차량을 단계적으로 폐기하기로 한 결정에, 아쉬움은 없었나요?

“내가 자랐던 문화는 가솔린 엔진의 시대였어요. 화석연료를 태우고 시끄러운 엔진음과 배기관이 필수인 시대였죠. 아쉬움은 있지만, 전기차의 장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론입니다. 지금 나오는 전기차량들을 보세요. 얼마나 조용하고 깨끗합니까? 수소차의 폐기물은 수증기뿐이죠.”

-자동차 제조업에서 모빌리티 기업으로의 전환은 언제부터 생각했죠?

“5~6년 전부터 구체화시키고 있어요. 지속가능성이 남용되고 있지만, 저에게 지속가능성은 오래된 옷과 같아요. 자동차 디자이너는 항상 기술과 복잡성의 전면에 나와있어요. ‘예쁘게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지구의 에너지 생산과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깊은 프로세스입니다.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죠.”

-현대는 올해 전세계 수소차 시장에서 50%를 웃도는 점유율로 판매 1위를 고수하고 있어요. 내연기관차와 수소차를 디자인하는 건 어떻게 다른가요?

“기반 시설이 계속 갖춰지면서 수소차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죠. 저는 수소차 넥쏘를 오래 운전하면서 연료적인 시스템(30분 충전에 600km 주행)을 흥미롭게 보고 있어요. 일단 배터리를 바닥에 넣으면 나머지는 빈 공간입니다. 가솔린 차는 엔진, 기어박스, 연료 탱크 등 위치가 정해져 있어서 운신의 폭이 좁지만, 전기차, 수소차는 디자이너가 배치하기 나름이에요. 앞으로 자율주행이 보편화되면 핸들을 접어서 밀어넣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쓰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모빌리티의 변화에 맞게 도심의 디자인도 바뀌겠군요.

“그렇습니다. 차를 타고 자율주행하다가 막히면 공유 스쿠터로 갈아타고 또 어느 지점에선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2028년 항공 택시 목표)로 환승할 수도 있어요. 현대자동차 그룹은 차량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의 모빌리티 디자인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 중심이었던 자동차 시장에서 앞으로 한국차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까요?

“디자인 분야에 있어서는 이미 그렇게 됐어요. 한때 한국차가 다른 차의 카피였던 시대가 있었죠. 40년 전, 한국 자동차 산업이 초창기였을 때는 관찰하고 따라가는 게 전부였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판도가 바뀌었죠. 한국차는 이미 트렌드의 시작입니다. 특히 전기차와 수소차는 선두에 서있고, 유럽을 리드하고 있어요.”

-자긍심이 대단하군요!

“하하. 저는 제가 만든 차에 앉은 사람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도로에서 차량을 만나면 항상 차창 너머로 그들의 표정을 봐요. 모든 행위는 고객을 위한 거니까요.”

-가장 애착이 가는 모델을 몇 개 꼽아주시지요.

“보면 가장 반가운 차는 골프4예요. 아우디의 A2도 애착이 많죠.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동료가 A2를 타고 있어서 너무 기뻤어요. A2는 고효율자동차로 최대한 가볍게 공기역학적으로 설계했어요. 한국 차로 넘어오면 스포티지3와 K5를 좋아합니다.”

정의선 회장은 피터가 사내 스타트업처럼 일한다고 설명한다. 그가 팀원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는 것./사진=고운호 기자

-2010년에 파리 모터쇼에 공개했던 기아의 팝 콘셉트 카는 3인용 도시 콤팩트 차로 최적이더군요. 지금 전기 공유차로 생산할 의향은 없는지요?

“(반색하며)재미있는 생각입니다. 콘셉트 카는 보통 디자이너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훈련용으로 작업해요. 팝은 전기차가 감정도 없고 진지할 거라는 발상을 깼어요. 생기 있는 캐릭터를 갖고 있죠. 장난감 같은 셰이프인데, 이런 친근한 차가 전 도시 위를 다니면 정말 멋질 거예요.”

-자동차는 도심의 풍경을 극적으로 바꾸죠. 최근에 기아의 로고 디자인을 바꾼 이유도 궁금합니다.

“‘호랑이코 그릴’과 ‘직선의 단순함’이 정착된 이후에 우리는 더 젊어질 필요가 있었어요. 기아가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공표할만한, 더 의지적인 사인이 필요했죠. 저는 앰블럼보다 ‘기아’라는 이름 그 자체를 좋아해요. 그래서 직접 서명하는 느낌의 캘리그라피를 고안했어요.”

-공예적인 기품이 느껴지더군요. 혹시 서세옥 작가에게 영감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서세옥은 존경하는 아티스트죠.”

기아의 전기차 모델인 팝 콘셉트 카./사진제공=윌북

-디자이너란 어떤 존재인가요?

“작은 물건을 만드는 건축가죠. 테이블도 컵도 치약도 신발도 안경도 램프도 컴퓨터와 스마트폰도 다 디자인의 산물입니다. 자동차 디자인은 좀 더 난해하죠. 움직이는 물건이고 복잡성의 매력을 지녔어요.”

-어떤 차를 타고 다닙니까?

“스타리아, 미래지향적인 차예요. 독일 집에서는 현대 산타페와 기아 스팅어를 탑니다. 제네시스 gv80도 종종 운전하죠.”

-유럽과 아시아를 비행하며 항상 여행 중인 삶이 버겁지는 않습니까?

“아니요. 여행을 중요하고 즐겁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저는 디자이너니까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면 시각이 달라지고 삶이 풍요해져요. 다들 어떻게 살고 있나? 뭐가 필요한가?를 살필 수 있죠.”

-당신의 디자인 영토는 계속 확장될까요?

“구체적 디자인은 루크 동커볼케(벤틀리 수석 디자이너 출신)를 위시해서 여러 팀이 하고 있어요. 저는 이제 차를 다룬다기보다는 기업문화에 디자인적 사고를 적용시키고 있어요. 혁신적인 전기차 시대에 맞는 브랜드 경영, 강력한 ‘디자인 씽킹’을 제시해야 합니다. 수천 명의 직원이 비전을 이해하도록 간결하고 명확한 큰 그림을 보여줘야죠. 야망을 불어넣고 재능과 근면을 갖춘 사람을 골고루 배치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축구팀의 감독처럼 말이지요.”

"디자인은 기술에 형태를 부여할 때 가장 흥미진진합니다."/사진=고운호 기자

-조너선 아이브의 창조력과 스티브 잡스의 사업 감각이 만나 스마트폰이라는 혁신 모바일을 만든 것처럼 당신과 정의선 회장의 디자인 리더십이 새로운 모빌리티 세상을 만들어내길 기대합니다.

“애플과 비교하긴 어렵습니다(웃음). 하지만 그렇게 되길 희망해요.”

-마지막으로 이토록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항상 당신 곁을 지키는 물건은 무엇이죠?

“검은 안경. 샤프펜슬. 그리고 제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그린 그림과 편지를 코팅한 이 작은 파일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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