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엔 치과의사, 주말엔 컬렉터.."없어서 못 사는 옥승철·이건용 그림, 뜨기 전 알아본 비결은"

노자운 기자 2021. 12. 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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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 전 컬렉팅 본격 시작해 30여점 소장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고 '모호한' 작품 선호"
집에 책 4000권 소장.. 공부하고 작가에게 DM 보내기도
서울에 위치한 A씨의 치과 내부. 치과 원장인 A씨는 주말이면 갤러리와 옥션에 다니며 미술품을 감상하고 갤러리스트, 작가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사진 속 작품은 영국 화가 조지 몰튼 클락의 'Run Mouse Run'이다. /컬렉터 A씨 제공

팔겠다는 사람은 없는데 사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 매물은 없는데 대기자는 넘쳐난다. 그 어느 때보다 ‘불장(Bull Market·가격이 계속 오르는 강세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시장이다.

부동산이나 주식, 암호화폐 시장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류층이나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미술 시장 얘기다. 갤러리로 대변되는 프라이머리마켓(1차시장)은 물론 옥션 등 세컨더리마켓(2차시장)에서도 작품이 없어 못 파는 초유의 호황이 계속되고 있다.

미술 업계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불장을 이끌고 트렌드를 주도하는 힘이 젊은 컬렉터들에게 있다고 입을 모은다. 20~40대 컬렉터들은 50~60대와 다르게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명작을 스스로 발굴해낸다.

이들은 좋은 작품을 빨리 알아보기 위해 미술은 물론 미학과 미술사도 스스로 공부하며 지식을 키우려 노력한다. 젊은 컬렉터들이 미술품을 단순한 투자 대상으로 본다는 세간의 오해도 있지만, 미술에 대한 애정 없이 차익만 노리고 컬렉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울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40대 A씨는 미술품 수집을 약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해온 개인 컬렉터다. 집에 약 4000권의 책이 있다는 그는 미술 서적을 다독하는 한편 ‘디깅(digging·발굴한다는 뜻)’에 푹 빠져 지내고 있다.

A씨의 즐거움은 각종 아트페어에 참석하고 갤러리와 옥션에 수시로 방문해 작품을 살펴보는 것이다. 작품에 대해 궁금하면 작가의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메시지(DM)를 직접 보내 질문하고, 대화도 나눈다. 아직 거장의 반열에 오르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미리 알아보고 많은 사람에게 안목을 인정받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지난달 말, A씨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로비와 복도, 진료실 곳곳을 가득 메운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다. A씨가 약 2년 동안 집중적으로 수집한 미술품 컬렉션은 병원에 걸린 작품들을 포함해 30점이 넘는다. 다음은 주요 소장작에 대해 A씨가 직접 소개한 내용이다.

옥승철 작가의 'Mimic'. 높이 2.3미터, 폭 1.8미터 규모의 대형작이다. 대구미술관에서 개최한 팝아트 전시회에서도 공개된 적이 있다. /컬렉터 A씨 제공

“이 그림은 높이가 2.3미터, 폭이 1.8미터에 달하는 대형작으로, 3년 전 구매한 옥승철 작가의 아크릴화다. 대구미술관 국내 팝아트 기획전에서 전시된 적도 있다. 옥작가는 ‘아도이’라는 시티팝 가수의 앨범 표지 일러스트로 유명세를 얻었으며, 애니메이션 풍이 강해 일본 만화를 많이 보고 자란 세대도 좋아한다.

다른 작가들이 보통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후 촬영해 컴퓨터 이미지 파일을 만든다면, 옥 작가는 이미지 파일을 먼저 제작한 뒤 그것을 보고 실물 작품을 그린다. 원본이 캔버스로 존재하고 복제품이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는 보편적인 관행을 뒤집은 것이다.

옥 작가는 또 만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리지널리티(원작으로서의 독창성)와 복제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 이것이 작가의 연륜이나 철학이 쌓아올린, 캔버스 뒤에 숨어있는 ‘두께’다. 옥 작가의 작품이 대체로 명료하지 않고 ‘기로’에 있다는 점에도 마음이 끌렸다. 이 그림만 봐도 공격을 하려는 표정인지 화가 난 표정인지 모호하지 않나.

요즘 옥 작가의 작품은 컬렉터들이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아졌다. 이제 더는 매수 대기 신청도 받지 않을 정도다.”

왼쪽부터 데미안 허스트의 목판화, 헌트 슬로넴의 '버니(Bunny)'. 버니의 액자는 슬로넴이 벼룩시장에서 직접 구매한 앤티크 제품이다. /컬렉터 A씨 제공

“2년 전부터는 미술품 수집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였다. 아트시(Artsy)라는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다 옥션에서 두 점을 낙찰받았다. 왼쪽은 데미안 허스트의 목판화고, 오른쪽은 미국 작가 헌트 슬로넴의 유화 작품이다.

슬로넴은 직접 벼룩시장에 가서 오래된 골동품 액자를 사 모은 뒤 자신의 그림을 표구한다. 그래서 작품마다 전부 액자가 다르다. 이 작품의 경우 액자가 정말 앤틱해서 모슬린을 뒤집어쓴 여인의 초상화와 어울릴 것만 같은데, 모던한 그림을 넣어 놓았다. 그런 ‘부딪힘’이 흥미롭지 않나.

슬로넴이 토끼를 그린 이유도 재미 있다. 어느날 중국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동양인들에게 띠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더라. 그리고 자신이 토끼띠라는 사실을 알고 토끼 그림을 그린 것이다. 프랑스 코스메틱 기업 에스티로더의 회장 컬렉션에도 슬로넴의 토끼 그림이 포함돼있다.

허스트의 판화는 ‘컬렉터라면 데미안 허스트 작품 하나는 있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샀다. 비록 유행은 지났지만, 컬렉션을 구성하다 보면 다양한 작품들로 구색을 갖춰야 할 필요는 있다. 허스트는 세계적인 거장이며 ‘죽음’이라는 주제를 미학적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컨템포러리(동시대 미술) 작가로, 한 점 정도는 소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쿠사마 야요이의 1999년작 실크스크린. 표면에 박을 입혀 반짝이는 효과를 냈다. 쿠사마는 1999년을 끝으로 이 같은 기법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았다. 일본인 장인이 그 해 작고했기 때문이다. /컬렉터 A씨 제공

“요즘 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는 ‘호박’ 시리즈로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이다. 갤러리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놀러 갔다가 발견해 구매했다. 실크스크린 표면에 박을 입혀 반짝이는 효과를 낸 희소성 있는 작품으로, 박을 입히는 장인이 1999년 작고한 뒤로는 쿠사마가 이 같은 판화를 더 이상 제작하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작가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을 매우 중요시한다. 병이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들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쿠사마가 대표적인 예다(어린 시절 신체적 학대를 받은 경험 때문에 일정한 패턴을 강박적으로 그려 넣는다고 알려졌다).

쿠사마의 경우는 현재 고령이기 때문에 작고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며 최근 작품 값이 급등하고 있다. 호박 시리즈만 해도 1년 반 전까지 옥션에서 4000만원대에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작은 판화 작품도 1억원이 훌쩍 넘는다(1일(현지 시각)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는 가로, 세로 길이가 130센티미터인 호박 그림이 94억5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작가가 고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 그때부터 작품이 희소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건용 작가의 회화 작품. 컬렉터 A씨의 소장작과 유사한 작품이다. 소장작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아트부산

“한국 회화의 ‘거장’ 이건용 작가의 회화 세 점도 소장하고 있다. 이 작가는 1970년대 한국아방가르드협회를 끝까지 이끌며 군사정권의 이데올로기와 대립해 고초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아방가르드가 빛을 보며 인기를 얻게 되자 많은 컬렉터가 기뻐하고 있다.

올해 재미있게 읽은 책에 ‘현대 미술 작가가 하는 일은 클리셰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건용 작가도 자신만의 클리셰를 만들어낸 예술가다. 캔버스를 보지 않은 채 신체가 닿는 궤적으로 회화 작품을 그려내지 않았나(캔버스를 등지고 서서 팔을 뻗어 완성하는 ‘신체 드로잉’은 이건용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다).

소장 중인 이건용 작가의 그림 중 한 점은 친분이 있는 갤러리 대표 덕에 살 수 있었다. 2차 시장에서 팔면 훨씬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었겠지만, 그 대신 나에게 팔아줬다. 갤러리와의 친밀한 관계는 컬렉터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다.

2018~19년까지만 해도 돈이 있으면 원하는 그림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값을 깎는 것도 가능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미술 시장이 불장이 되면서 갤러리에서도 고객 명단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서상익 작가의 '시카고의 아침'. 거친 붓터치를 수일 동안 쌓아서 인물을 표현했고, 벽은 롤러를 이용해 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칠했다. /컬렉터 A씨 제공

“이 그림은 서상익 작가의 ‘시카고의 아침’으로, 내가 큰 애정을 갖고 있는 소장품이다. 인물이 그려진 부분을 보면 거친 붓터치로 형태를 표현했지만, 벽 부분은 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칠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나온 서 작가는 동년배 화가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 작가는 20대에 초현실적인 주제를 많이 다뤘다. 자신의 자취방 침대 위에 사자가 앉아있다든가 누워있는 남성 위로 스포츠카가 떠있는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는 그런 주제를 별로 다루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질감의 분명한 대비를 통해 초현실적 효과를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르네 마그리트(1898~1967,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의 ‘백지위임장(The blank signature)’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래서 서 작가를 직접 만나 내 느낌을 그대로 전달했더니, 터치가 강한 부분은 작은 붓으로 원하는 느낌이 표현될 때까지 수일에 걸쳐 터치해 완성했고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은 롤러로 정성스럽게 색을 입혔다고 하더라. 본인은 사람들이 질감의 대비를 너무 과하게 느끼지는 않을까 걱정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작가와 직접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은 컬렉터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컬렉터가 그림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요즘은 인스타그램으로 메시지를 보내도 친절하게 답변해주는 작가가 많다. 한번은 뇌과학과 미술에 관한 책을 읽다가 어떤 작가가 떠올랐는데, 그 분에게 메시지를 보내 내 느낌을 그대로 전달했더니 책을 꼭 읽어보겠다고 하더라. 이런 소통이야말로 컬렉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다.”

남춘모 작가의 '스프링(Spring)'. /컬렉터 A씨 제공

“남춘모 작가의 부조 회화 ‘스프링(Spring)’이다. 작가가 어릴 때 동네에서 본 논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남 작가는 나무 패널 위에 광목을 걸치고 아크릴 용액을 적신 뒤 잘라서 다시 배열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작가만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작품을 빨리 되파는 데 관심이 있지는 않으나, 세계적으로 수요가 있을 만한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주로 산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은 값이 한번 하락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해외에서 수요가 있는 작품들은 그럴 위험이 낮다. 이우환·박서보 작가의 그림이 꾸준히 인기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이란 정해져 있지 않다. 헝가리 과학자 버러바시 얼베르트 라슬로가 쓴 ‘성공의 공식 포뮬러’라는 책에는, 예술가가 언제 블루칩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예측하게 해주는 인덱스는 ‘얼마나 빨리 메이저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전시하느냐’라는 내용이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전시한 경험이 있거나 타데우스로팍 같은 갤러리의 전속 작가가 된다면, 세계적인 수요가 어느 정도 입증됐다고 봐야 한다.

남 작가는 독일에서 활동해왔고, 얼마 전에는 알렉스 카츠(1927~)와 잭슨 폴록(1912~56) 등의 작품을 전시했던 코블렌츠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세계 미술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인정받은 작가다.”

전광영 작가의 '집합'. 직접 수집한 고서를 잘라 스티로폼이나 나무를 감싼 뒤 화면에 붙여, 멀리서 보면 입체적인 단색화 같다. /컬렉터 A씨 제공

“전광영 작가의 ‘집합’이다. 직접 수집한 고서를 잘라서 나무나 스티로폼을 감싼 뒤 색을 칠하고, 화면에 붙여 형태를 만들어냈다. 입체적인 작품이지만 우리나라 단색화 전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단색화가들은 서양 단색화가와 다르게 ‘질감’을 중요시한다. 이 작품도 멀리서 보면 요철(凹凸)을 통해 질감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멀리서 보면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35, 극단적인 추상 미술을 추구한 러시아 화가)나 미니멀리즘 회화 같은데, 작품을 제작한 과정이나 자세히 들여다본 관자(觀者)가 느끼는 감정은 정 반대다. 조각을 일일이 종이로 감싸는 고된 작업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니 말이다.”

조지 몰튼 클락의 'Run Mouse Run'. /컬렉터 A씨 제공

“우리 병원에 걸려 있는 영국 화가 조지 몰튼 클락의 대형 회화다. 이 화가는 한남동이나 청담동 대형 주택을 인테리어하는 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인기가 높아졌다. 특히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작품은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작가가 앞으로 더는 그리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올해 5월 부산아트페어에도 조지 몰튼 클락의 작품이 여러 점 출품돼 큰 화제가 됐다. 나는 부산까지 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서울옥션에 마실 나가듯 놀러 갔는데, 때마침 위탁 판매용으로 들어온 이 작품을 우연히 발견했다. 부산에서 매진된 몰튼 클락의 작품들 중에도 미키마우스 그림은 없었다.

지금 전 세계 미술 시장은 추상을 지나 다시 구상의 시대를 맞고 있다. 추상표현주의가 전 세계를 정복한 지 수십 년 만에 알렉스 카츠가 구상화를 들고 나와 트렌드를 바꿔 놓았고, 조지 콘도(1957~)와 헤르난 바스(1978~) 역시 구상화가다.

구상화가 세계적으로 대세가 되고 있고, 그 외에 성 소수자(LGBT)의 정체성을 표현한 회화와 스트리트 문화의 요소를 담은 회화도 뜨고 있다. 몰튼 클락의 작품 역시 스트리트 문화의 느낌이 강하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신발 자국도 찍혀 있다.”

이브 클랭 재단에서 정식 인증한 판화 '헬레나(Helena)'. /컬렉터 A씨 제공

“프랑스 누보레알리즘을 대표하는 이브 클랭(1928~62)의 석판화(리토그래프)다. 아내와 함께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클랭의 작품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는데, 몇 달 전 국내 갤러리에 이 판화가 소장돼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표님을 조른 끝에 받아서 침실에 걸어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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