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독감·코로나.. 정부가 진실을 숨기면 실패는 반복된다

양지호 기자 2021. 12. 4.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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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가 읽고 방역 대책 정비한 책.. 美, 1차대전 당시 독감 발병 숨겨
유럽 파병길 선상에서 집단 감염, 한국 청해부대 사태 연상되기도
100년 전 이야기 되새기는 이유 "감염병의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

그레이트 인플루엔자

존 M 배리 지음|이한음 옮김|해리북스|776쪽|3만8000원

“진실은 관리하는 게 아니다. 진실은 말해져야 한다. 1918년이 남긴 한 가지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

당시 18억이던 세계 인구 중 최대 1억명이 1918년 시작된 ‘스페인 독감’으로 숨졌다. 존 M 배리 미국 툴레인대 공중보건 및 열대의학과 교수가 쓴 ‘그레이트 인플루엔자’는 스페인 독감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저작으로 꼽힌다. 2004년 나온 이 책은 코로나 팬데믹 향방을 이해할 단서로 지난해 다시 소환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됐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던 감염병에 관한 치밀한 기록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생명력이 넘친다. 스페인 독감 당시 위기 상황에서 당국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이 곧 3년째에 접어들지만 ‘진실’에 대한 의구심은 계속 남아있다.

스페인 독감은 1차 대전 막바지 미국에서 시작됐다. 미국은 신병 양성을 위해 수만명씩 수용하는 거대한 군 훈련소를 세웠고, 급조한 막사에 신병을 욱여넣었다. 막사는 독감 바이러스 전파와 변이를 위한 배양접시가 됐다. 윌슨 대통령을 비롯해 미군 지휘관들은 사기 하락을 우려해 독감 유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신병들이 전출 가면서 독감은 미 전역으로, 그리고 1차 대전이 벌어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언론 통제가 허술했던 스페인에서 독감 관련 보도가 이어지면서 애꿎게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잠시 코로나 팬데믹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자.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원인 불명 폐렴이 발생했다. 중국 보건 당국과 세계보건기구는 두 달 가까이 이를 공식화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은 진실을 ‘관리’하려 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지적처럼 “중국 공산당이 투명했다면 코로나 팬데믹은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우한 폐렴’이라고 불렸던 질병은 ‘COVID-19′로 명명돼 세계를 휩쓸고 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유행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코로나 유행 국면에 “마스크를 벗으라”며 “바이러스는 사라진다”고 했다. 방역 상식을 무시하고 거짓 정보를 퍼뜨린 것이다. /해리북스

한국 정부는 투명한 정보 공개를 했다면서 2년 동안 ‘K방역 성공’을 자화자찬하고 있다. 확진자 수는 재깍재깍 공개했지만, 얼마나 진실했을까. 지난달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기까지 정부는 ‘집단면역’을 주장했다. 백신 접종률이 70%가 넘으면 코로나 유행이 억제된다고 했다. 그러나 접종률이 80.2%를 기록한 지난 3일 정부는 방역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확진자는 하루 5000명을 넘나들고 있고, 전염력이 더 강한 오미크론 변이도 한국에 상륙했다. 정부가 말한 ‘집단면역’은 의학적 근거에서 나온 말이었나. 대선을 앞두고 경제 활성화를 위한 희망 사항의 발로였나. ‘위드 코로나’라며 지난달부터 숙박 할인권을 뿌린 정부와, 1차 대전 당시 독감에 걸린 장병을 각지로 수송했던 미국 정부는 어떤 차이가 있나.

800쪽에 가까운 책은 스페인 독감 이전의 미국 의료체계와 세균·바이러스에 관한 연구 1차 대전 전개 등 여러 분야를 다각적으로 살핀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독감 대유행 중 미 육군이 수송함 리바이어던호에 장병을 실어 유럽으로 보내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출항하기 전 독감 증상을 보인 병사를 제외했는데도, 48시간이 지나기 전에 의무실에 독감에 걸린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환자들이 쏟은 피가 바닥 곳곳에 웅덩이를 이루며 고였다. 병사들은 배 전체에 피 발자국을 남기면서 돌아다녔다. 리바이어던호의 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전 2시에 이름 둘, 오전 2시 2분에 다시 이름 둘. 오전 2시 15분에 다시 이름 둘, 그런 식으로 죽 이어졌다. 일지에는 오로지 사망 기록만 반복되고 있었다. 수장(水葬)이 시작됐다. 곧 이는 장례라기보다는 위생 조치에 가까운 일이 됐다. 수송선은 떠다니는 관이 되었다.”(443쪽)

지난 7월 부대원의 90%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청해부대 집단감염 사태가 떠오른다. 부대원들이 코로나가 아닌 스페인 독감에 걸렸고, 1차 대전 당시처럼 항생제도 진단키트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어떤 꼴이 났을까. 2004년에 미국에서 나온, 1918년 스페인 독감에 대한 이야기를 코로나 유행 3년 차가 다가오는 지금 읽어야 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다. 어떤 실패는 그대로 반복된다.

이 책은 과거를 알고 대책을 세워도 결국은 결정권자가 중요하다는 것도 상기시킨다. ‘그레이트 인플루엔자’를 읽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5년 미국 공중보건 시스템을 재정비한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 같은 매뉴얼을 무시했고 “바이러스가 기적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결정권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은 대가를 미국은 지금까지도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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