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표 999번 찍던 ‘빙수의 황제’… 어쩌다 권좌에서 밀려났나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21. 12.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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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원조 프리미엄 빙수 ‘밀탑’
현대백화점서 철수한 이유
지난 11월 29일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 5층 ‘밀탑’ 매장. ‘브랜드 사정으로 영업이 종료되었습니다’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김성윤 기자

“어머, 완전히 문 닫은 거야? 항상 바글바글하던 곳인데.” 월요일이었던 지난 29일 오후 3시,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 5층 빙수집 ‘밀탑’을 찾은 중년 여성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동행한 여성은 “이 백화점을 20년 넘게 다녔지만 이 집이 이렇게 휑한 건 처음 본다”고 했다.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입구에는 ‘브랜드 사정으로 영업이 종료되었습니다’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백화점 측은 “압구정 본점 밀탑은 11월 22일, 나머지 매장은 21일 자진 폐점했다”고 했다.

밀탑은 번호표를 뽑아서 기다려야만 먹을 수 있을 만큼 인기를 누려온 빙수집. 한여름에는 주말 대기번호표가 999번까지 찍힐 정도였다. 요리연구가 홍신애씨를 비롯해 많은 이가 “가장 이상적인 빙수”로 꼽았고, 일본·중국·동남아 관광객들이 물어물어 찾아올 만큼 해외에까지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밀탑 빙수 먹으러 현대백화점 간다’ ‘밀탑이 백화점 매출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대백화점을 대표하는 매장이기도 했다. 1985년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이 문 열 때 첫 매장을 낸 뒤 전국 현대백화점 계열 점포에 집중적으로 입점했다. 밀탑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된 국내 매장 22개 중 17개가 현대백화점·아울렛 등에 입점해 있다. 지난 2013년 기준 연 매출이 100억원을 넘었고, 영업이익 4억6000만원을 냈다.

밀탑은 국내 최초의 빙수 전문점으로 꼽힌다. 창업자 김경이씨가 일본으로 디자인 공부하러 갔다가 디저트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85년 현대백화점이 오픈할 때 ‘후르츠 칼라’라는 과일 전문점을 열었다가 몇 달 뒤 빙수 전문점으로 전환했다. 메뉴는 밀크·녹차·과일·커피 빙수 단 4가지. 대표 메뉴인 밀크 빙수는 얼음과 팥, 연유, 떡 2쪽이 전부로 단순하지만 각각의 재료를 최고의 품질로 고집하면서 성공했다.

얼음은 낮은 온도에서 단단하게 얼려 수십 년 된 기계에 오랜 경력을 지닌 전담 직원이 갈았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식감이 일품이었다. 팥은 국산만을 골라 팥알이 터지기 직전까지 삶아 하루 이틀 냉장고에서 숙성 과정을 거친 뒤에야 사용했다. 팥 맛에 반해 팥죽을 먹으러 오는 단골도 많았다. 빙수에 올리는 꿀에 절인 인절미는 방앗간에서 매일 받아 사용했다. 냉장고에 두었다가 사용하는 팥을 제외한 모든 재료는 당일 소진이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밀탑 대표 메뉴인 '밀크 빙수'./인스타그램

프리미엄(고급) 빙수로서 밀탑의 위상은, 2010년 서울 신라호텔이 제주산 애플망고를 듬뿍 올린 ‘애플망고 빙수(애망빙)’를 선보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해 부산 떡 카페 ‘시루’는 기존 빙수보다 훨씬 곱게 간 얼음에 콩가루와 인절미를 얹은 ‘인절미 설빙’을 내놨다. 애망빙과 인절미 설빙은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곡물·과자·초콜릿·치즈 등 새로운 식재료를 더한 창조적인 빙수가 속속 나왔다. 시루에서는 2013년 아예 빙수 전문점 ‘설빙’을 열었다.

이처럼 빙수 전문 프랜차이즈가 생겨나고, 아이스크림·커피 전문점이 자체 빙수를 고급화하며 경쟁이 치열해졌다. 밀탑은 실적이 차츰 악화했다. 지난해 매출은 82억원으로 급감했고, 영업이익은 5억4200만원 적자로 전환했다. 적자가 누적돼 결손금이 작년 기준 42억6000만원으로 불어나 자본잠식 상태다.

외식업계에서는 “밀탑의 실적 부진과 부채 급증은 치열해진 빙수업계 경쟁 때문만이 아니라 경영권이 2차례 바뀌고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동안 본업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많다. 밀탑은 창업주 김경이씨가 연예인 매니지먼트사 대표이기도 했던 아들과 함께 운영하다 2016년 옐로모바일 자회사 데일리금융그룹에 경영권을 넘겼다. 데일리금융그룹은 2018년 밀탑 지분을 유조이그린홀딩스란 회사에 넘겼다.

밀탑 본사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직영보다 가맹 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동안 밀탑은 품질·서비스 등을 엄격하게 관리할 수 있지만 임대료·인테리어 등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직영 위주로 운영해왔다. 밀탑측은 “위기를 기회 삼아 꼭 재기하겠다”며 “현재 광교아브뉴프랑점, 수서역점, 아산병원점, 다산리코빌점, 세종나성점, 광주상무점, 오시리아테마파크점, 전남도청점 등 8개 점이 운영 중이며, 제주서귀포와 대구수성구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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