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중국 핵폭, 미국은 소련 타격설'에 세계가 들썩

2021. 12. 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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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5〉
소련의 핵 공격에 대비한 중국은 바위에 굴 파는 작업을 독려했다. [사진 김명호]
1969년 9월 11일, 베이징공항에서 열린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소련 수상 코시킨의 회담은 팽팽했다. 실무자 회담과 대사 교환 재개만 합의했다. 점심시간은 예외였다. 오찬을 담당했던 인민대회당 주방장이 회고를 남겼다. “주메뉴는 카오야, 오리구이였다. 공항까지 운반하다 보니 제맛이 안 났다. 중국 특유의 양념장에 볶아서 내놨다. 코시킨은 최고라며 하라쇼를 연발했다. 얼떨결에 만든 요리를 코시킨이 극찬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 음식점이 코시킨의 음역(音譯)인 커스진(柯西金·가서금)에 오리(鸭)를 붙인 요리를 선보였다.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커스진야(柯西金鸭)는 이렇게 탄생했다.”

런던 언론, 브레즈네프 암호 전문 보도

닉슨은 중국 무술의 열렬한 팬이었다. 중국 무술 대표단 일원인 리롄제(李連杰)와 악수하는 닉슨. 1974년, 백악관. [사진 김명호]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코시킨과 저우언라이의 합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중국 강경책을 고집했다. 영국주재 공보관에게 은밀히 손을 쓰라는 암호 전문을 보냈다. 회담 2주 후, 런던 유명 언론의 보도에 세계가 들썩거렸다. “소련이 중국의 핵실험 기지를 폭격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도 소련 134개 도시와 중요 군사시설, 도로, 기업을 목표로 핵 타격 계획을 진행 중이다.” 10월 1일 밤, 코시킨이 브레즈네프에게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다. “중국의 미사일 기지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미국도 중국의 이익이 자신들과 부합됨을 분명히 했다. 이미 우리와의 핵전쟁 계획을 수립했다.”

브레즈네프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국 주재 소련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라.” 주미대사의 보고는 구체적이었다. “안보보좌관 키신저를 만났다. 중국의 이익이 미국의 이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닉슨 대통령의 의중이다. 중국을 공격하려면 3차 세계대전을 감수해야 한다.” 브레즈네프는 중국과 상극이던 미국이 결정적인 시점에 중국 편을 들지도 모른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간 미국에게 농락당했다”며 개탄했다. 미국은 소련이 최대의 적이라는 생각을 바꿔본 적이 없었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와 코시킨의 합의를 무시했다. 인력과 물자를 분산시켰다. 1년간 베이징이 술렁거렸다. 마오는우한(武漢)으로, 린뱌오(林彪·임표)는 쑤저우(蘇州)로 거처를 옮겼다. 베이징의 지도급 인사들도 서쪽의 산간지역으로 이동했다. 시내에는 저우언라이와 총참모장 황용셩(黃永勝·황영승)만 남고 다수의 원로들은 베이징에서 광저우(廣州)까지 연결되는 중요지역으로 보냈다. 전쟁 준비가 끝나자 베이징대학도 이전을 서둘렀다. 전국의 과학 인재들이 운집해있는 과기대학은 일찌감치 안후이(安徽)에 터를 잡았다.

1971년 4월 14일, 인민대회당에서 미국탁구선수대표단 임원들과 환담하는 저우언라이. 이날 미국 측에 중요한 메시지를 보냈다. [사진 김명호]
미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동유럽 주재관들이 중국 외교사절과 접촉을 시도했다. 소련과 밀접한 국가가 대부분이었다. 중국 얘기만 나오면 딴소리하기 일쑤였다. 화장실 갔다가 안 오는 경우도 많았다. 닉슨이 직접 나섰다. 1970년 10월 25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중국 방문을 앞둔 파키스탄 대통령 야히아 칸에게 당부했다. “미·중 관계 회복이 중요한 시점이다. 베이징에 고위 관리를 극비리에 파견하고 싶다. 최종 목표는 우호 관계 수립이다. 내 말을 베이징 측에 구두로 전달해주기 바란다.” 11월 10일 베이징,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마친 야히아 칸이 저우에게 다가갔다. “할 말이 있다.” 2주 후, 야히아 칸은 워싱턴 주재 파키스탄 대사를 통해 저우의 구두답신을 닉슨에게 전달했다. “중국영토 대만에 주둔 중인 미군 철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닉슨 대통령 특사의 베이징 방문을 환영한다.” 12월 16일, 닉슨도 답신을 보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 간에는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대만 문제도 그중 하나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지구의 긴장 상태가 완화되면, 그 지역의 미군을 감소시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

파키스탄을 통한 양국의 서신 왕래가 시작됐다. 전 주영대사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가 구술을 남겼다. “주고받은 서신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본론뿐이었다. 날짜나 시간도 적혀있지 않았다. 주로 영문을 사용했다. 인쇄된 것도 간혹 있었지만 손으로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번역은 항미원조 정전 담판 시절 개성에서 속기사로 함께 일했던 전 포르투갈 대사 궈자딩(過家鼎·과가정)과 국제사회에 낸시탕으로 널리 알려진 주석의 통역 탕원셩(唐聞生·당문생)이 주로 했다.” 서신 왕래는 순조롭지 않았다. 월남전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번지자 중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미국의 인도차이나반도 침략과 전쟁 확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서신 왕래도 중단됐다. 비난 문구가 예전과 달랐다. 미 제국주의 타도만 요란했다. 닉슨에 대한 공격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마오, 미 탁구선수단 베이징 초청 지시

인간 세상은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1971년 4월 초, 나고야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문혁으로 국제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중국이 갑자기 출전을 결정했다. 4월 4일, 미국 선수가 중국 선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합 없는 날 함께 교외에 놀러 가자.” 이튿날 미국 선수가 티셔츠를 선물했다. 중국 선수는 수건으로 답례하고 단장에게 달려갔다. 나고야 상황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이 잠자리에 들 무렵 간호사를 불렀다. “총리에게 미국 선수단을 베이징에 초청하라고 전해라.” 간호사는 지혜로웠다. “방금 수면제를 드셨습니다. 수면제 복용 후 내린 지시도 유효합니까?” 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후 미국대표단 단장은 중국대표단의 베이징 방문 제안에 당황했다. 도쿄의 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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