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중국 핵폭, 미국은 소련 타격설'에 세계가 들썩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5〉
런던 언론, 브레즈네프 암호 전문 보도
브레즈네프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국 주재 소련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라.” 주미대사의 보고는 구체적이었다. “안보보좌관 키신저를 만났다. 중국의 이익이 미국의 이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닉슨 대통령의 의중이다. 중국을 공격하려면 3차 세계대전을 감수해야 한다.” 브레즈네프는 중국과 상극이던 미국이 결정적인 시점에 중국 편을 들지도 모른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간 미국에게 농락당했다”며 개탄했다. 미국은 소련이 최대의 적이라는 생각을 바꿔본 적이 없었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와 코시킨의 합의를 무시했다. 인력과 물자를 분산시켰다. 1년간 베이징이 술렁거렸다. 마오는우한(武漢)으로, 린뱌오(林彪·임표)는 쑤저우(蘇州)로 거처를 옮겼다. 베이징의 지도급 인사들도 서쪽의 산간지역으로 이동했다. 시내에는 저우언라이와 총참모장 황용셩(黃永勝·황영승)만 남고 다수의 원로들은 베이징에서 광저우(廣州)까지 연결되는 중요지역으로 보냈다. 전쟁 준비가 끝나자 베이징대학도 이전을 서둘렀다. 전국의 과학 인재들이 운집해있는 과기대학은 일찌감치 안후이(安徽)에 터를 잡았다.
파키스탄을 통한 양국의 서신 왕래가 시작됐다. 전 주영대사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가 구술을 남겼다. “주고받은 서신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본론뿐이었다. 날짜나 시간도 적혀있지 않았다. 주로 영문을 사용했다. 인쇄된 것도 간혹 있었지만 손으로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번역은 항미원조 정전 담판 시절 개성에서 속기사로 함께 일했던 전 포르투갈 대사 궈자딩(過家鼎·과가정)과 국제사회에 낸시탕으로 널리 알려진 주석의 통역 탕원셩(唐聞生·당문생)이 주로 했다.” 서신 왕래는 순조롭지 않았다. 월남전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번지자 중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미국의 인도차이나반도 침략과 전쟁 확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서신 왕래도 중단됐다. 비난 문구가 예전과 달랐다. 미 제국주의 타도만 요란했다. 닉슨에 대한 공격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마오, 미 탁구선수단 베이징 초청 지시
인간 세상은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1971년 4월 초, 나고야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문혁으로 국제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중국이 갑자기 출전을 결정했다. 4월 4일, 미국 선수가 중국 선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합 없는 날 함께 교외에 놀러 가자.” 이튿날 미국 선수가 티셔츠를 선물했다. 중국 선수는 수건으로 답례하고 단장에게 달려갔다. 나고야 상황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이 잠자리에 들 무렵 간호사를 불렀다. “총리에게 미국 선수단을 베이징에 초청하라고 전해라.” 간호사는 지혜로웠다. “방금 수면제를 드셨습니다. 수면제 복용 후 내린 지시도 유효합니까?” 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후 미국대표단 단장은 중국대표단의 베이징 방문 제안에 당황했다. 도쿄의 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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