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퇴조 발레리의 예감
김호정 2021. 12. 4. 00:21
폴 발레리 지음
임재철 옮김
이모션북스
“우리 문명들은 이제…우리가 죽을 운명에 처해있다는 것을 안다.” 프랑스의 시인·비평가·사상가인 발레리(1871~1945)의 유명한 구절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쓴 글 ‘정신의 위기’ 첫 문장.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밝은 미래를 내다보던 유럽인들이 서구의 몰락을 예감하던 시절이었다.
발레리는 유럽인들이 지혜를 모아 이룩한 지식이 거대한 대륙의 아시아, 지구 반대편의 미국으로 이전됐다고 봤다. “유럽이 아시아 대륙의 한 곶이 된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진 그는 “천칭은 점차 반대 방향으로 기울 것”이라며 유럽의 위기를 예견했다.
이 책은 대표작인 ‘정신의 위기’를 비롯해 ‘정신’을 키워드로 하는 발레리의 글을 모았다. 옮긴이는 “여기서 정신은 정확히 말하면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묵묵히 쌓아온 것, 즉 문명에 관련되는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발레리는 독재가 생기고 유지되는 메커니즘, 진보의 역사에 대한 글에서도 독창적 통찰을 선보인다. 가라타니 고진(80)은 “오늘날의 EU가 미국과 일본에 대항해 형성된 것인데, 그 미래를 발레리가 19세기 말에 예견했다”고 평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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