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분열, 미국은 불량..세상은 어디로?
도널드 서순 지음
유강은 옮김
뿌리와이파리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1930년 파시스트 감옥에서 남긴 글이다. 당시는 대공황이 시작된 이듬해이자 무솔리니가 로마에 진군한 지 8년 뒤, 그리고 히틀러가 집권하기 3년 전이었다. 그런데 근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그런 상황이 데자뷔(기시감)가 되는 걸까.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은 이런 물음에서 출발한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기는 하다. 그람시가 말한 위기 국면은 잠재적인 혁명적 상황이 아니라 ‘병적 징후’들이 가득한 ‘공백기’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한편으론 유사한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을 너무나 광범위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진단하고 있다. 위기에 빠진 21세기 세계를 대해부한 세계사 편력(編曆)이다.
유럽인들은 입만 열면 “난민이 유럽에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17%만이 유럽에 수용됐다.
한때 외국인 혐오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에서조차도 이슬람 혐오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 시대에 사라져 가는 낡은 것 중 하나는 1945년 이후 30년간 서구를 지배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합의,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와 복지다. 그동안 유럽을 통치해 온 기성 정당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으며 2020년에 이르러 특히 개혁적인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가 유럽 전역에서 전면적으로 패배했음이 분명해졌다. 중도우파 등 다른 주류 기성정당들도 날로 힘을 잃어 가고 있다.
패권국가 미국은 쇠퇴하는 중이다. 미국의 국방비는 전 세계 국방비의 36%를 차지하지만 미국 군대의 총체적 무능은 거의 모든 해외 원정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미국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물리치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 국가를 건설한다는 미국의 목표는 완전히 실패했다. 대신 등장한 것은 마약국가였다. 미국은 이라크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민주주의 국가를 확립하는 데 실패했다. 미국은 외국에 개입할 때마다 자기가 돕는 나라를 전보다 망가뜨려 놓았다.
제국 미국은 또한 모범적인 나라가 아니다. 인종 분열은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처럼 지금도 심각하다. 경찰에 살해되거나 교도소에 갇히거나 가난한 흑인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다. 총기 난사는 일상이 되었다. 미국 교육부의 연구에 따르면 성인 3200만 명이 글을 읽지 못한다. 미국인의 2016년 기대수명은 1993년 이래 처음으로 감소했다. 2016년 신생아 사망률은 쿠바보다 높았다. 이 밖에도 미국을 실패한 국가로 여길 수 있는 통계 리스트는 끝이 없다.
유럽은 여전히 심층적으로 분열돼 있다. 지금까지 유럽연합(EU)은 전 지구적 경기침체, 중동 위기, 아랍의 봄, 그리고 코로나19 등 유럽 연대의 시험에서 모조리 실패했다. 위기가 벌어져도 모든 나라가 각자도생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처지다.
한때 경제학자들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에서 모든 게 가장 좋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확신하지 못한다.
한국 또한 이 같은 병적 징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약간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본 세계사이긴 하지만 이 책은 한국이 지금 처해 있는 좌표를 찾아내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정확한 진단을 하지 않고서는 적절한 치료법을 찾지 못하는 법이다.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은 낡은 것은 무엇이고 새로운 것은 또 무엇인지 탐색해 볼 수 있는 좋은 참고서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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