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전통을 정리해 근대의 문을 열다

입력 2021. 12. 3. 23: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창은 판소리 정리한 신재효 고장
근대라는 서구적 관념서 벗어나야

정읍에서 내려서 다른 일행과 합류하기로 했다. 내가 기다리는 소설가는 무척이나 열심히 쓰는 사람인데, 그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인생이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의 문단 생활 초기에 우리는 그렇게 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지금은 달라졌다. 세월이 흐르면 동질감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확실히 같은 부류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혼자 정읍역에 내려 소설가를 기다리며 높게 지은 역사 위에서 정읍이라는 이 오래된 도시를 바라보며 나는 아까부터의 생각을 다시 곱씹는다. 현대문학 공부를 시작한 이래 근대는 하나의 아포리아였다. 외력에 의해 근대의 길을 걸었다는 것, 이 말에는 우리가 능동적이거나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뉘앙스가 스며들어 있었다. 파고들다 보면 이것은 결코 뉘앙스 문제가 아니요, 문명이나 인간을 보고 평가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근대는 아무래도 서양에서 들어온 구분법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신 중심의 천년 왕국 중세를 가운데에 두고 그 이전이 고대요, 그 이후는 근대라 하는 것이 이 역사 삼분법인 것이다. 왜 넷으로, 다섯으로 나누지 않고 셋이냐 하는 것은 동양에서는 필연성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프 시인 임화는 이런 삼분법에 익숙할 뿐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르크시스트였다. 그러나 그는 식민화를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고, 퇴영성 또는 영퇴성이라는 것도 넘어서고 싶어 했다. 그의 ‘개설 조선 신문학사’가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되는 것도 서구와 조선의 오랜 교섭을 통해 이미 조선이 근대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대로 임화와는 다르게 한국에서의 근대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면 고창은 서정주를 떠올리기 전에, 무엇보다 19세기 후반에 우리의 전통적인 문학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의 고장이었다.

신재효는 동리정사(桐里精舍)라는 소리청을 지어 이곳을 무대로 소리광대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던 판소리가 전성기를 맞이하도록 했다. 그는 그 판소리들을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토별가(토끼타령), 적벽가, 변강쇠타령 등의 여섯 마당으로 정리했고, 판소리에서 그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발림) 등을 중요한 요소로 정립한 판소리의 이론을 세웠는가 하면, 스스로 많은 노래를 지어 공연하기도 했다.

나의 공부는 아직 이 신재효까지 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광수에서 신재호와 이인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칠 수는 없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을 지금 갖는다. 근대라는 서구적 관념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신재효의 판소리와 최제우의 동학과 동학가사와 19세기 초의 천주교 박해 같은 문제들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한다.

정읍에서 고창으로 가는 길은 도로는 새로워도 차들은 별로 없다. 오늘의 한국이 서울로 수도권으로 자꾸만 집중되는 까닭이다. 나는 고창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개벽’에서 차상찬이 호남의 정읍과 고창을 논의하며 전북의 해안선에 관해 말한 것을 떠올린다.

전북의 해안선은 군산항에서 시작해서 남으로 고창군 상하면에까지 걸쳐 연장 241리라 했다. 근해에 섬들이 많아 연도, 어청도, 고군산군도, 개야도, 함식도, 계화도, 비응도 등 61개에 달하는 도서(島嶼)들이 있고 그래서 아주 좋은 어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했다. 그 연안 일대에 어염, 즉 어업과 염전업의 이득이 많다고도 했다.

과연 고창은 높은 고(高) 자에 높을 창(敞) 자를 쓰건만 고색창연하고도 아름다운 전통의 도시다. 이곳 분에게 나는 고인돌로도 이름 높은 이 고장에 덮개돌 무게가 300t이나 되는 고인돌까지 있다는 말을 듣는다. 영국의 고대 거석문화 유물인 스톤헨지가 따라올 수 없는 ‘공법’으로 지어진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고창에서의 일을 마치고 ‘책이 있는 풍경’에 들러 한 사람이 책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보며 신재효와 고인돌을 다시 생각한다. 저 먼 선사시대부터 스스로 전통을 정리해 근대의 문을 연 신재효까지, 고창은 다시 한 번 와야 할 곳이 아닐 수 없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