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거물이 시장경제 비판하고 기후변화·금융 특사로..그는 어떤 가치에 주목했나 [전희상의 런던 책갈피]

전희상 경제학 박사 2021. 12. 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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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의 토대를 생각하다

[경향신문]

마크 카니
<가치(들): 모두를 위한 더 좋은 세상 만들기>

이스라엘의 한 어린이집에서 정시에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직원들이 저녁 늦게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오히려 지각 사례가 늘어나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벌금이 일종의 비용으로 간주되면서 정당한 값을 치르고 마음 편하게 아이를 늦게까지 맡기겠다는 부모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가치(들): 모두를 위한 더 좋은 세상 만들기>의 저자 마크 카니에 따르면 이 사례는 시장경제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 보여준다. 어린이집은 시장경제 논리를 따르는 사업체지만 단지 시장논리만으로 운영되지는 않는다. 교사(사업자)는 아이들을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부모(고객)는 교사를 정중하게 대한다는 상호신뢰와 존중의 암묵적 원칙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급한 일이 있을 때 부모가 조금 늦을 수 있다는 사정에 가격을 매기기 시작하면 의도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업의 토대가 흔들리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시장경제는 시장경제 외부에 위치하는 ‘가치(들)’의 기반에 서 있다. 기회의 절대적 평등, 결과의 상대적 평등, 세대 간 조화 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들)에 균열이 생기면 시장경제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카니의 주장이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속성상 시장 ‘가치’의 영역이 지속적으로 팽창하면서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를 지속적으로 위협한다는 사실이다.

카니는 캐나다와 영국의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금융계의 거물이다. 두 G7 국가의 중앙은행 수장으로 재임하면서 2007년 세계 금융위기와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G20 산하에서 국제금융시스템 모니터링과 제도개선을 담당하는 금융안정위원회(FSB)를 7년간 이끌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화폐의 안정성 역시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근본적인 가치(들) 중 하나이며 중앙은행이 이 가치의 수호자라고 언급한다. 종이 한쪽에 불과한 지폐의 가치에 사람들이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까닭은 중앙은행이 그 구매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사회적 신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2007년의 금융위기 이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저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이 1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다. 동시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경제권 주택가격의 폭등은 화폐의 안정성이 과연 제대로 유지되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2020년 영국 중앙은행 총재 자리에서 물러난 카니는 이후 유엔 기후변화 및 금융 특사로 임명됐다. 지난달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는 의장국 영국의 금융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는 다소 뜬금없지만 가치(들)에 대한 그의 강조를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커리어 전환이다. 기후변화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야기한 가치(들)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카니는 기후변화문제에 대한 대응이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인 세대 간 조화를 해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전희상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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