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16세기 유럽에도 집단 지성은 존재했다
16세기 유럽에는 '편지 공화국'이라는 미지의 국가가 존재했다. 국경도, 정부도, 수도도 없는 이 국가에서 시민들은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된 편지와 출판물을 주고받으며 지적 욕구를 채웠다. 분야를 막론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지식 공동체였다.
역사학자 앤서니 그래프턴은 이 공동체의 윤곽을 시민들이 남긴 수천 통의 편지를 분석해 책에 그려냈다. 책의 원제이기도 한 '단어로 만들어진 국가(Worlds Made by Words)'는 모든 사상과 이론이 글로 자유롭게 오가는 이 공동체의 수식어였다.
저자는 도서를 연구하는 학문인 서지학(書誌學)의 창시자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를 시작으로 프랜시스 베이컨, 요하네스 케플러 등 당시 새로운 학문적 흐름을 만들어낸 학자들이 어떻게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는지 추적한다.
베네딕트회 수도원장으로 신학과 성경 연구에 몰두한 트리테미우스는 학자들의 방문을 유인하기 위해 도서관을 책으로 가득 채울 정도의 애서가였다. 그가 만든 서지학은 편지 공화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어 경험적 사실을 토대로 지적 노동자들이 협력하는 과학 연구기관을 주창한 베이컨과 천문학자이면서 성경 속 등장 사건의 시기를 연구한 연대학자로 신학자들과 논쟁한 케플러를 통해 저자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펼친 시민들을 소개한다.
저자는 근대 유럽 학자들이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토론하는 모습과 현시대를 대조하며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사회적 논쟁거리를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는 점을 강조하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 사례로 1963년 기자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 해나 아렌트를 인터뷰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낸다. 논란과 오해 속에 사회 분위기가 가열되며 아렌트는 인터뷰를 거절한다. 저자는 아렌트의 책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오고가는 것을 식탁 위 부모의 대화를 통해 목격한다. 가정에서 벌어진 그 대화를 저자는 '진지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람들의 진지한 대화'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대화를 계획하는 것은 물론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게 한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저자는 인간의 판단을 방해하는 '잡음'이 너무 커졌다고 지적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나 문자메시지로 전달되는 방대한 정보가 사람들에게 대화를 준비하는 기회를 앗아갔다고 말한다.
저자는 정보기술(IT)의 발달로 토론의 장인 도서관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 것도 인간의 역량을 저하시키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문자 기록을 디지털화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추진돼왔다.
하지만 저자는 구글과 같은 거대 IT기업이 추진하는 전자도서관 사업을 '거대한 소방호스'라고 평가절하한다. 저자는 활자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종이책을 읽는 전통적 방식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도서관이야말로 시대를 불문하고 공공 지식인들에게 지적인 토론과 인문학적 논쟁의 생명력을 되살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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