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1930년대 감성의 현대적 해석 '소설가 구보의 하루'

박상우 기자 2021. 12. 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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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박태원 단편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영화화
| 흑백화면으로 담은 아름다운 인사동, 대학로 거리
| 영원히 반복되는 인간의 고통 '권태 그리고 외로움'

출연: 박종환·김새벽·기주봉
감독: 임현묵
장르: 드라마
등급: 12세이상관람가
러닝타임: 73분
한줄평: 홍상수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팝콘지수: ●●◐○○
개봉: 12월 9일
줄거리: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고집하며 글을 쓰는 무명 소설가 구보가 하루 동안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의지와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꼭 등장하던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소설, 박태원 작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영화화됐다. 작가 지망생 구보의 따분한 하루를 그린 원작의 내용처럼, 영화 역시 이렇다 할 사건 없이 단조롭게 흘러가는 구보의 하루를 흑백화면으로 차곡차곡 담아낸다.

다만, 원작 소설에서는 지식인으로서 구보가 느끼는 고뇌, 우월감, 행복, 권태 등 다양한 감정들이 독백 대사를 통해 강렬하게 표현되는 반면, 이 작품은 관객이 적극적으로 구보의 심리상태를 읽으려고 하지 않으면 별다른 감상 없이 영화가 끝날 수 있을 만큼 느슨한 구조를 갖고 있다.

물론, 넉넉한 길이로 잘린 쇼트들과 공백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편집은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도 자아내고, 아름다운 서울 풍경을 감상할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는 데 적합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자꾸만 홍상수가 떠오르는 이유



자신의 작품 세계만을 고집하며 글을 써오고 있는 무명 소설가 구보(박종환)는 선배 기영(김경익)이 편집장으로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자신의 소설 출간 여부를 결정짓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소설이 출판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에 구보는 허탈한 마음으로 거리를 배회하며 오랜 친구부터 전 여자친구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영화는 그 과정들을 최소 1분은 족히 넘는 쇼트들로 담아내며 상당히 느린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에선 홍상수 감독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한국 영화에서 롱테이크가 마치 홍 감독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롱테이크를 빼더라도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이 만들어 놓은 영화적 세계관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

거리를 배회하는 주인공, 생활고를 겪는 예술가, 언제나 속썩이는 이성 문제,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문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신경질적인 말투, 찌질한 중년 남성, 미모의 젊은 여성 그리고 술. 대부분의 설정이 어쩐지 익숙하다. 이를 두고 임현묵 감독은 1930년대를 살았던 지식인 구보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혔지만, 완성된 작품의 모습은 홍상수 감독의 영역 안에 있다.

그렇다고 홍상수 감독의 작품만한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연출 방식에 있어서 즉흥과 우연을 강조하는 홍상수 스타일과 달리, 임현묵 감독은 디테일한 카메라 움직임까지 계산해 가며 프레임 안의 모든 사물을 정교하게 배치했다. 그만큼 자유로움이 없다. 똑같이 어색한 연기라도 홍상수 영화에선 생동감 넘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다가오지만, 이 영화에선 그저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는 이유다.

그럼에도 의의가 큰 영화


영화의 완성도, 미학적 성취를 제쳐두고라도 영화 '소설가 구보의 하루'는 의미가 있다. 일상 속 권태라는 감정은 1930년대에는 새로웠기에 의미가 있었고, 2021년에는 가장 본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모두가 컴퓨터로 작업하는 세상에서 아직도 원고지에 친필로 글을 쓰는 구보의 모습은 누군가에는 낭만적으로, 누군가에겐 딱하게 다가온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태에 발맞추지 못하고 느끼는 소외감, 무력감 같은 심리 역시 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또 인사동 거리나 대학로 등 서울의 예스러운 정취가 묻어나는 공간을 멋스럽게 담아낸 촬영도 인상적이다. 롱테이크로 자유롭게 찍은 듯 착각하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물의 어깨를 살짝 걸어서 찍은 OS샷이나, 구옥의 문틈으로 아슬아슬하게 포착하는 구보의 모습 등은 이 영화의 모든 쇼트가 치밀한 계산 아래 촬영됐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만큼 아름다운 그림들이 많으며, 스토리와 무관하게 눈이 즐겁다.


오래 전부터 많은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시나리오를 써온 임현묵 감독이 옛 소설의 뒷이야기를 상상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76분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1930년대 구보가 느꼈던 감정과 오늘날 많은 예술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영화화해보고 싶다는 집념도 생겼으리라 짐작한다.

결말도 희망차다. 앞서 홍상수 감독의 작품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뚜껑을 닫은 작품의 모습은 또 다르다, 왠지 모르게 세상을 비관하는 홍상수 감독과 달리 이 영화는 희망을 말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는다.

좌절감과 고통으로 가득 찬 구보가 어느 포인트에서 생각의 대전환을 하게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구보는 어리석은 욕망을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명확한 설명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관객들은 구보의 하루를 다시 돌아보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지 고민해 보게 된다.


박상우 엔터뉴스팀 기자 park.sangwoo1@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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