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가치 부여하는 '주소'.. 富와 권력의 산물

기자 2021. 12. 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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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주소 이야기│디어드라 마스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주소는 단순히 위치 지정 아냐

행정 구역에 따라 가치 달라져

인도 빈민가엔 거의 주소 없어

신원증명 안돼 슬럼 탈출 못해

문명·사회 발달하며 주소 출현

장소·권력·공간·정체성 등 고찰

주소에 담긴 역사·의미 풀어내

2014년 1월 1일,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됐다. 일대 혼란이 일어날 거라는 예언 아닌 예언도 있었지만, 큰 탈 없이 안착하는 분위기다. 도로명 주소로 전환하는 표면적 이유는 ‘일제 잔재 청산’이지만, 사실 1996년부터 추진된 정책으로 적잖은 예산을 투입했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처럼 주소는 (때론 정치적인, 때론 사회적인) 저마다의 사연과 이유를 갖고 있다. 변호사이자 작가인 디어드라 마스크의 ‘주소 이야기’는 거리 이름, 즉 주소에 담긴 한 사회의 역학관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주소를 결정하는 것은 ‘권력’ 문제라고 단언한다. “이름을 짓고, 역사를 만들고, 누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왜 중요한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권력이기 때문이다.

인도 콜카타(구칭 캘커타)의 빈민가는 주소가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사실 주소보다 시급한 문제도 많다. “위생 설비, 깨끗한 물, 의료 서비스는커녕 장마철 호우를 피할 지붕”도 없는 곳이 많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주소가 없어 빈민가를 벗어날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도 주민들은 생체인식 신원 증명서인 아다르 카드(Aadhaar card)를 소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출산 지원은 물론, 연금과 진학 같은 공공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이곳 빈민들은 “주소가 없기 때문에” 카드 발급이 쉽지 않다. 변화는 비정부기구(NGO)인 ‘주소 없는 이들에게 주소 만들어 주기 운동’(Addressing the Unaddressed)에서 비롯됐다. 이 기구가 만든 주소를 사용해 한 자선재단이 인구를 조사했고, 그곳에서 벌여야 할 사업, 특히 아동노동 문제가 심각한 곳 등을 찾아냈다. 주소가 생기면서 아이들의 진학에 필요한 출생증명서도 받기 수월해졌다. 주소가 모든 걸 바꿀 수는 없지만, 낮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한다.

100㎞에 달하는 고대 로마의 도로와 거리에는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함없이 유지”돼 온 “성벽, 아치, 교차로, 광장, 분수대, 경기장, 언덕, 강과 같은 도로, 접합점, 경계, 지형지물”을 이정표 삼아 가야 할 곳은 어렵지 않게 찾아갔다. 후각을 이용해 특정 장소를 찾을 수도 있었다. 어떤 분수대는 오줌 냄새를 풍겼고, “몸에 막 바른 향유 냄새”를 따라가면 공중목욕탕이 나왔다. 검투사 놀이하는 아이들의 소리, 철컹철컹 대장간 소리, 가마꾼들의 소리 등 청각으로도 도시 곳곳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도시가 더 커지면서, 즉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주소의 출현은 불가피했다. 초창기 거리 이름은 ‘실용’을 최우선으로 했다. 중세시대 서서히 생겨난 잉글랜드의 거리 이름은 “근처 나무나 강, 길 끝에 있는 농장, 모퉁이에 있는 여관의 이름”에서 따왔다. 선조들은 “되는 대로” 거리 이름을 지었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렇게 지은 이름들에서 그곳이 왕년에 어떤 곳이었는지 흥미롭게 상상하게 된다. ‘나이트라이더(기사) 스트리트’는 “창 시합에 나가는 기사들이 지나다니던 길”이고, ‘버드케이지(새장) 워크’는 “왕실 동물원이 있었던 자리”였다.

앞서 주소가 권력의 산물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혁명 후 거리 이름이 바뀐 경우들이 왕왕 있다. 1792년 9월 프랑스 국민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기로 결의하자 “그 다음날부터 프랑스인들은 자녀의 이름은 물론, 자신의 이름도 마음대로 지을 수 있게” 됐다. 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성경 속 인물이나 성인의 이름”으로만 이름을 지을 수 있었다. 혁명 직후 “파리를 밀어 버리고 말끔히 정리한 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과격파도 있었지만, 국민의회는 해체 대신 “명패를 바꿔 달기”로 결정했다. 화려한 궁전은 공공시설로 개조됐고, 개조할 수 없으면 이름을 새로 붙였다. “창의적인 작명을 향한 혁명파들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도로명으로 확대됐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은 곧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소는, 특히 미국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는, 바꾸려는 사람들과 지키려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의 소재이기도 하다. 미국 남부 여러 도시에는 여전히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의 장군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이 많다. 플로리다주 할리우드시에 있는 리 스트리트(Lee Street)는 남부 연합군 총사령관 기병대장 로버트 E 리의 이름에서, 포러스트 스트리트(Forrest Street)는 기병대장 출신 네이선 베드퍼드 포러스트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공교롭게도 “흑인 지역인 라이베리아를 관통하는 도로”들이다. 일부 뜻있는 흑인들은 할리우드 시의회에 민원을 제기하는 등 공을 들이고 있지만, 도로명 변경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흑인들도 있다. 한 흑인 주민이 들려주는 이유가 씁쓸하다. “밤낮으로 두 가지 일을 하기 때문에 신분증이나 고지서의 주소를 바꿀 시간이 없다.” 저자는 언뜻 보면 사소해 보이는, 이 주소에 얽힌 권력과 돈, 그리고 정체성을 찾기 위한 다양한 분투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소 이야기’는 그간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주소에 굵직한 역사가 얽혀있음을 알려주는 미시사이자 거시사이며, 읽는 재미까지 더한 흥미로운 책이다. 496쪽, 1만8000원.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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