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요구하는 '비폭력'이 가장 공격적이고 강력한 실천

최원형 2021. 12. 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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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젠더이론가 주디스 버틀러
윤리학과 정치학 잇는 독창적 담론
상호의존하는 취약한 인간 존재
'새로운 평등주의적 상상계' 주창

비폭력의 힘
윤리학-정치학 잇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정아 옮김 l 문학동네 l 2만원

‘폭력’은 이른바 좌파 진영 사상가들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법이나 경제, 국가 등 현실 세계가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되레 가장 심각한 폭력이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어떤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름의 ‘정당화’ 도식을 개발하기도 한다. 착취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의 ‘자기방어’ 또는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의 ‘대항 수단’ 같은 폭력은 반대하거나 제지하기 어렵다는 식이다. 슬라보이 지제크처럼 과격한 이들은 발터 베냐민의 ‘신적 폭력’ 논의를 끌어와 ‘혁명적’ 폭력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미국의 철학자·젠더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65)는 <비폭력의 힘>(원제는 The Force of Nonviolence, 2020)에서 평등을 요구하는 힘으로서 ‘비폭력’에 주목한다. 2016~2019년 사이에 했던 강연을 토대로 삼은 이 책은 그가 최근까지 주력해온 ‘윤리와 정치의 결속’ 작업을 압축하고 있다. 성소수자 차별부터 이주민과 난민 문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등 인종차별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그는 ‘취약성’, ‘상호의존성’ 등의 주요 개념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담론을 벼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비폭력은 정치철학과 윤리학을 함께 묶어내는 그의 사유를 잘 보여주는 주제다.

핵심에는 ‘취약성’(vulnerability)이 있다. 과거 서구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사회의 기원으로 ‘자연상태’란 것을 상상하고, 그 이후에 나타나는 개인들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회피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지은이는 ‘자연상태’에 대한 상상 속에 인간의 원초적 근본형상은 개인, 곧 “의존적이지 않은 남성 성인”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해냈다. “자연상태 가설이라는 테제에 맞서는 나의 반테제는 자력으로 지탱될 수 있는 몸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삶 전체에서 다른 누군가, 또는 사회적·경제적 형태들의 지지에 의존해야 하는 신체에 갇힌 취약한 존재다. 이런 의존성을 극복하고 자립성을 획득하는 것, 곧 혼자 먹고살 수 있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코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없기에, 우리는 개인이 아닌 관계로서 엮여 있다는 사실, 곧 상호의존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2014년 스위스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비폭력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미국 출신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모습. EPA 연합뉴스

상호의존성은 평등의 문제와 뗄래야 뗄 수 없으며, 바로 여기에서 비폭력을 옹호해야 하는 근거가 출현한다. 상호의존성은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착취와 폭력의 조건이 될 수 있다. 만약 현실의 사회적 유대관계가 어떤 생명은 살리지만 다른 어떤 생명은 살지 못하도록 작동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명정치적 관리와 전쟁의 논리는 어떤 등급표에 따라 생명에 대한 애도가치를 불평등하게 분배함으로써 폭력을 만들어내고, 대개는 이를 국가와 법이라는 수단으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모든 인간(개인)은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력하며, “취약 집단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온정주의적 권력만 강화할 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상호의존성의 관점에서 도출되는 “평등주의적 상상계”, 곧 평등에 대한 상상력과 요구다. “평등은 개인 주체의 속성으로 출현하는 권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로부터 출현하는 권리”이며, 폭력은 바로 그 사회적 유대관계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불복종’에 더 가까운, 이런 비폭력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꺼려진다면, 그 배경에는 비폭력이 국가와 법을 앞세운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은밀한 용인이 되지 않을지 하는 불안과 우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발터 베냐민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집중한 작업은 폭력에 대한 정당화 도식들 자체의 한계를 묻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신적 폭력’이 법폭력을 파괴한다는 그의 주장은 폭력에 주목하는 동시에 비폭력을 견지할 수 있는 ‘초법적 소통’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풀이한다. 만약 법폭력에 대항하는 노력들을 가리키기 위한 이름이 필요하다면, “이미 특정 프레임 내부에서 정의되어 있고 항상 그런 틀에 의해 해석되는” 폭력의 개념이 과연 필요할까?

무엇보다 지은이는 사회적 유대관계라는 것이 ‘양가감정적’ 형태를 띠고 있다는 데 주목하며, 그 어떤 모순이라도 직시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관계성이란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이어져 있다는 표시도 아니며 파괴라는 반테제에 맞세워야 할 윤리적 당위도 아니다.” 사회적 유대관계는 우리를 지지해주지만, 갈등과 공격성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는 파괴할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왜 파괴하지 말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내가 상대방을 파괴하면 나의 삶 역시 위태로워진다는 관계성의 본질을 성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생명의 애도가치를 차등적으로 다루는 불평등한 현실 속 폭력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에 대항하는 비폭력을 주장할 수 있다. 이로써 비폭력의 윤리적-정치적 실천은 단지 ‘폭력을 하지 마라’는 명령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생명이 평등하게 긍정되어야 한다는 가장 급진적 요구로 나아간다. 이런 차원에서 비폭력은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무력하고 수동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휘두르는 주체만 ‘자리바꿈’하며 불평등을 계속 만들어내는 폭력보다 훨씬 더 저항적이고 공격적이며 힘이 세다.

이런 주장에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되레 지은이는 “그들이 지나치게 현실에 매료되어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연 취약성을 극복해내는 영웅적 개인이, 부당한 국가폭력을 한 번에 뒤집어엎는 대항폭력이란 게 가능할까? “사회관계들의 시달림 속에서 계속 생존해나가는 것이 폭력적 권력의 최종적 타도”라는 지은이의 통찰이 더 현실적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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