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미·중 고래 싸움에 등 터지지 않으려면

임민혁 정치부 차장 2021. 12. 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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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반열 올라” 자찬하면서 신장 인권탄압 규탄은 외면
원칙·가치 일관성 지켜야 외교 공간 찾고 존중받아

얼마 전 만난 외교관은 베이징 올림픽을 화제로 얘기하다 “손기정이 겹쳐 보인다”고 했다. 최근 미국 등 서구권은 중국의 신장 위구르 지역 인권 탄압을 명분으로 ‘외교적 보이콧’을 거론하고 있다. 이 외교관은 “지금 위구르족 상황은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식민 치하 우리와 다를 바 없지 않냐”고 했다. 억압받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한국이 종전 선언 같은 쇼를 위해 이를 모르는 척하고 최고위급 축하 사절을 보내는 게 맞느냐는 것이다.

물론 보이콧 움직임이 구체화된 것도 아니고 방역 등 다른 고려 사항도 있기 때문에 당장 뭘 결정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 다만 미·중 대결의 파도가 전방위에서 몰아치는 이 시점에 국제 무대에서 우리의 기본 원칙과 지향점을 근본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바이든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 /AFP 연합뉴스

지금 이슈가 되는 인권은 정치나 양자 관계의 하부 개념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마땅히 앞장서서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인권위 행사에서 “항상 인권을 위해 눈 뜨고 있어야 한다”고 한 것도 이런 인식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난 10월 전 세계 43국이 유엔에서 중국의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을 비난하는데 한국은 불참했다. 성명에 적시된 ‘잔혹하고 비인간적 고문, 강제 불임, 성적 및 젠더 기반 폭력, 아동 강제 분리’에 눈을 감은 것과 다름없다.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은 별개다. 청와대는 우리가 G7에 버금가는 위상에 올라섰다고 자찬하지만, 정작 G7이 한목소리로 인권 수호를 외칠 때 우리는 높아진 국격을 보여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이 부끄러운 모습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는다.

우리는 대외 관계에서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대의 원칙과 가치를 쉽게 허무는 모습을 너무 자주 되풀이해왔다. 이는 ‘유연함’이나 ‘실용’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고 최강대국들과 핵무장한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 탓만 하기도 어렵다. “그럼 전쟁하자는 거냐” 같은 위협으로 합리적인 문제 제기를 억누르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가 좋으면 변명이라도 되겠지만, 지난 정부가 천안문 망루에 오르고 현 정부가 북한·중국의 눈치를 보며 굴종한 결과는 뭔가. 핵 시계는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고, 북·중은 우리를 존중하기는커녕 만만한 호구 취급 하고 있다.

지금 모든 국제 정치는 미·중의 대결 구도로 수렴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오커스(AUKUS), 쿼드, 민주주의 정상 회의에 맞서 중국은 러시아·파키스탄 등이 포함된 상하이협력기구(SCO)에 이란까지 끌어들이며 반미(反美) 대오를 다지고 있다. 미·중이 벌이는 전쟁은 미래 국제 정치 질서와 첨단 과학기술 패권을 놓고 벌이는 건곤일척의 대결이다. 단기간에 멈추지 않을 소용돌이 속에서 전세계는 끊임없이 쉽지 않은 선택 순간을 맞닥뜨릴 것이다.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 고민은 그중 극히 일부다. 요소수 사태 같은 나비 효과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

이처럼 풍랑이 거센 때일수록 확고한 원칙과 지향점을 내세워 일관성 있게 운신해야 우리의 공간을 찾을 수 있다. 원칙과 대의를 무시하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결국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하고 불신만 초래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모 대선 후보의 특보는 “한국은 미·중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다만 새우일 때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가벼운 처신이 돌고래 때는 눈에 확 띈다. 또한 돌고래도 대왕고래 사이에 끼어 있으면 목숨이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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