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이 여자'는 누굴 뽑으라고
대학생이던 2013년 일이다. 지하철 2호선 역에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끈질기게 따라오던 한 남성이 인적 드문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돌변했다. 움직일 수 없도록 뒤에서 한쪽 팔로 어깨와 목을 감았고, 다른 손으로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경찰서 성폭력 전담 수사팀에서 두 시간 넘게 진술 녹화를 했다. 두려움에 떨며 몰래 찍은 범인 사진 일곱 장도 수사관에게 보냈다. 그러고 두 달 뒤, ‘더 이상 범인을 특정하거나 추적할 단서가 없어 미해결 사건으로 분류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던 날카로운 인상의 그 남성은 아마 이후에도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몇 년 전 이런 이야기를 지인 여럿과 나눈 적이 있다. 친구들이 ‘나도 얼마 전 밤길을 걷는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하며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의 두려움을 털어놨다. 함께 있던 남성들은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사실 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밤길이 안전한 편이야” “남자들도 어두운데 혼자 걸으면 무섭기는 해” “큰일 날 뻔했네. 성별이 아니라 범죄자들이 문제이긴 한데”…. 이들이 모든 남성의 생각을 대변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가슴팍이 꽉 막힌 듯 갑갑했던 그날의 기분은 잘 잊히지 않는다.
이날의 허탈함을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매일 느낀다. “대통령 후보들이 2030 표심 잡기에 나섰다”는 소식이 쏟아지는데, 2030의 절반은 어리둥절하다. 이들이 말하는 2030의 기본값이 ‘남성’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이재명 후보는 이미 속내를 들켰다. 젊은 세대의 설움을 얘기하며 “지금 청년 세대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 동료·친구들 또는 ‘여자 사람 친구’와 격렬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오피스 누나’ ‘옥수동 누나’ 같은 말이 오갈 땐 한심했다. 그가 헤어진 여자 친구와 그의 어머니를 총 37번 칼로 찔러 살해한 친조카 사건을 두고 ‘데이트 폭력’이라 표현했을 땐, 두려워졌다.
윤석열 후보도 한숨 나오긴 마찬가지다. 여성들이 사귀던 남성에게 ‘헤어지자’ 했다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보도되는데, 관련 공약은 전자 발찌를 평생 채우겠다는 게 전부다. 대신 성폭력 무고죄를 강화하겠단다. 무고죄가 입증됐을 때 엄벌하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성 평등 공약’이나 ‘여성 공약’은 아니다. 공약의 빈약함을 메워보겠다고 강력 범죄 엄벌과 약자 보호에 목소리를 높이던 교수를 영입하기에 마음을 놓았더니, 이젠 당대표가 나선다. “지지층(안티 페미)을 잃는다”며 온라인 남성 커뮤니티의 심기 경호에 골몰한 그의 모습에 ‘이여자(20대 여자)’들은 경악하고 있다.
주변 여성들 사이에선 “그 당에 대단한 여성 공약을 기대한 적 없다. 상식선만 되어도 말뿐인 ‘페미니스트 대통령’에 화난 여성들이 모른 척 뽑아줬을 텐데. 떠먹여 줘도 못 먹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제 누가 남았나. 스토킹 처벌법 강화·성범죄 엄벌 등 현실 인식과 공약은 훌륭하지만 내년 3월쯤엔 사라질 것 같은 후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기는 하지만 임차인이 남의 집에서 영구히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후보? 여성들은 대선 이후가 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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