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나와 제보자

신민정 2021. 12. 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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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신민정 | 법조팀 기자

지난 주말 오랜만에 한국 영화 <모비딕>(2011)을 다시 봤다. 기자가 되기 전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기자와 제보자의 관계’란 이런 줄로만 알았다. 갑작스레 일어난 의문의 폭발사고, 모두가 북한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던 때, 홀연히 나타난 제보자가 건네는 자료 뭉치…. 믿기지 않는 제보를 받아든 기자는 사건 추적에 나서고, 여러 어려움 끝에 기자와 제보자가 힘을 합쳐 진실을 밝혀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일정 부분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개봉 당시 기자의 삶이란 이런 일들의 연속인가 보다라고 짐작했다.

영화를 끄고 현실로 돌아온다. 얼마 전 한 제보자와 서로 얼굴을 붉혔다. 법원에서 재판 중인 그는 “재판부의 소송지휘가 이상하다”며 내게 제보를 했다. 얼른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싶은데, 재판부가 이래저래 선고를 늦추고 있어 억울한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취지였다. 그는 영화 속 제보자처럼 적지 않은 소송자료를 보내주었다.

문제는 소송자료를 읽어보고 그의 사건 진행 상황을 살펴봐도 ‘보도를 할 만한 사건’인 것 같지는 않다는 데에 있었다. 당연히 모든 재판 당사자는 재판이 빨리 진행되길 원한다. 법원도 신속한 재판 진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만 검사의 요청이든 판사가 좀 더 심리를 해보고 싶어서이든 정해진 재판 기일이 연기되는 일은 꽤 자주 일어난다. 이 사건 기일변경에도 뚜렷한 이상 정황이 있는 건 아니어서, 기사로 나갈 만큼 아주 특이하거나 문제적인 사건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모비딕> 속 불도저 같은 이방우(황정민) 기자와 달리 현실의 기자는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거듭 확인해보느라 시간을 끌었고, 결과는 파국이었다. 답답해진 제보자가 밤낮으로 독촉했고, 기자는 고민 끝에 ‘기사화하긴 무리인 것 같다’는 뜻을 전했고, 오랫동안 기사화를 기다려온 제보자는 기자에게 힐난을 담은 메시지를 보낸 것을 끝으로 둘의 연락은 끊어지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 현실 속 기자와 제보자의 관계는 이따금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끝나기도 한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들어 특히 어렵다고 느끼는 건 제보자와의 관계다. 모든 제보는 소중하다. 상식을 뒤엎는 거대한 사건의 서막도, 엎어질 뻔한 기사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는 것도 언제나 제보다. 제보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기자는 단 한명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제보가 곧 기사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 기자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당사자에겐 충분히 분노할 만한 일이어도, 이 사건이 기사로 내보낼 만큼 중대하고 공적 이익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언론을 빌려 자신의 수사나 재판을 유리하게 바꿔보기 위해서, 때로는 누군가를 음해하려는 목적으로 거짓 제보를 보내오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제보를 살펴본 뒤 ‘보내주신 제보는 감사히 받았고 억울해하시는 마음도 공감합니다. 다만 이러이러한 이유로 기사로 쓰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어떻게 최대한 의미 왜곡이나 오해 없이 제보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가 늘 고민이다. 어디까지나 기사 가치를 고려한 판단이지만, 가끔은 누군가 ‘도와달라’며 나를 지목해 손을 내밀었는데 매몰차게 뿌리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해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커지기도 한다.

영화는 이상적인 기자와 제보자의 모습을 보여줬으나 현실이 항상 그렇진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앞으로도 몇몇 제보를 바탕으로는 기사를 쓰고, 몇몇 제보에 대해서는 기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다가 어떻게 답장을 보내면 좋을까 고뇌하는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왜 내 기사를 안 써주냐’고 비난하는 제보자와는 재차 얼굴을 붉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정답은 없다. 그저 들어오는 제보는 꼼꼼히 살펴보고 제보자에게 연락을 취해보는 수밖에. 결론은, 제보 환영합니다.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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